"휴일도 없이 소나 말처럼 일해야 했다."
"죽어도 채탄 중 사고사(事故死)로 처리됐다."
"조선인들이 모이면 이유 없이 구타했다."


▶ 책 '조사(調査)·조선인 강제노동-탄광편'에서 발췌

일본의 강제 징용, 살아남은 이들이 떠올리기에 너무 끔찍한 기억이다. 그 기억을 되짚어보려고 한다.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은 어떤 '노역(勞役)'을 했던 것일까?

강제징용 실태

1938월 4월 1일, 일본은 일본 점령지를 대상으로 인적·물적 자원을 모두 동원하라는 '국가총동원법'을 공표했다. 제국주의 야욕에 눈먼 일본이 '중·일 전쟁(1937년 일본의 중국 침략)'을 벌이면서 일본 본토 내 자원만으로는 전비를 충당하고 전력을 강화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한반도에 인력 수탈 정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934년 일본으로 강제 징용된 충청남도 홍성 지역 젊은이들.

일본의 국가총동원법은 크게 노무 동원과 병력 동원(징병), 군 위안부 세 가지 형태로 진행됐다. 이 가운데 노무 동원은 광산·항만·공사장·군수공장·농장 등 산업 현장에 인력을 배치하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노무자(勞務者)라는 것은 임금을 받고 일하는 사람을 뜻하는데, 당시 노무 동원된 조선인들 대다수는 강제적으로 끌려갔고, 임금은커녕 허기도 면하지 못한 채 밤낮으로 중노동에 시달렸다. 일본인 감시자들의 폭력 속에서 도망치지도 못했다. 열악한 환경에서 목숨을 잃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일본의 노무 동원이란, '강제 노역'이었던 것이다.

지난 2015년 한 지상파 프로그램에 출연한 일본 강제 노역 생존자는 "거기 가서나 탄광인 줄 알았지"라며 "창살 없는 감옥에서 살다시피 하고 왔다"고 증언했다. 관련 기사▶

일본이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서 패망하고 국가총동원법을 폐지한 1946년 전까지 강제 노역에 동원된 조선인들의 규모를 명확하게 알기는 어렵다. 일본 정부가 공개한 '조선총독부통계연보'에 따르면, 강제 징용된 조선인은 782만 7355명이다(중복 인원 포함). 당시 조선인 전체 인구는 2630만여 명으로 약 30%가 강제 징용 대상이었다. 이 또한 위안부 피해자들은 포함되지 않은 수치며, 일본 정부가 통계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동원 인원을 축소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강제노역 장소

조선인이 강제 노역한 지역은 광범위했다. 일본뿐만 아니라 한반도, 중국 만주, 러시아 사할린, 태평양 남양군도, 동남아시아 등 일본의 권력이 미치는 산업 현장이면 조선인들이 있었다. 특히, 탄광 채굴과 군 기지 건설, 군수물자 생산 등에 수백 명, 많게는 수만 명이 투입됐다.

올해 개봉한 영화 '군함도' 역시 강제 노역에 조선인들이 집단으로 동원된 지역 중 하나인 일본 나가사키 현 하시마 섬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일본 열도 내 조선인 강제 노역의 역사가 서려 있는 곳은 어디일까?

군함도:

일본 나가사키 현(長崎県) 남서쪽에 있는 무인도인 하시마(端島)는 해상군함을 닮아 '군함도'라고 불린다. 하시마 섬이 군함 모양이 된 것은 일본 전범기업 '미쓰비시(三菱)'가 이곳 해저 탄광에서 석탄을 채굴하기 위해 시멘트를 매립하고 사방에 콘크리트 벽을 세우면서부터다.

조선인 500~800여 명이 군함도로 끌려왔다(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의 추정치). 해저 1000m 탄광 갱도로 내려가 평균 45도가 넘는 고온과 95% 습도, 유독가스 속에서 석탄을 채굴했다. 하루 12시간~16시간 일하면서 사료·비료에나 쓰일 만한 찌꺼기로 겨우 끼니를 때웠다. 일본인 헌병이 칼을 차고 이들을 감시했다.

군함도에는 아파트를 비롯해 학교·병원 등 주거에 필요한 시설이 갖춰져 있었지만, 일본인을 위한 공간이었다. 조선인들은 3평 남짓한 목조건물에 웅크려 자야 했고, 암석에 의한 부상·피부병·과로·굶주림 등 몸이 아파도 방치됐다.

[눈물과 한(恨) 서린 작은 섬]

다카시마 섬:

미쓰비시 주도로 다카시마(高島) 섬에는 하시마 섬에 앞서 해저 탄광이 개발돼 있었다. 다카시마 섬은 시멘트를 매립해 3개의 섬을 이어붙인 것으로, 하시마 섬보다 규모가 더 컸고, 미쓰비시가 일본 대표 군수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토대였다.

다카시마 탄광으로 끌려온 조선인은 4000여 명에 달했다. 그중 익사·압사·병사한 조선인들의 시체가 다카시마 섬 한쪽에 무더기로 매장됐다. 미쓰비시 측에서 사망자 신원을 적은 위패를 불태워버려 조선인들의 유골이 몇 구나 묻혀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지금도 '공양탑(供養塔)'이라는 이름으로 비석이 남아 있지만, 가는 길이 폐쇄됐다.

유바리 시:

홋카이도(北海道) 중심부에 있는 유바리 시(夕張市)는 일제강점기 최대 석탄도시였다. 전범기업 '단코키센(北海道炭礦汽船)'과 미쓰비시를 중심으로 유바리 탄광이 운영됐다. 이곳에서는 7000명이 넘는 조선인들이 노역했는데 대다수 폭발 위험이 있는 갱내에서 채광을 전담했다. 홋카이도청이 1999년 작성한 '조선인 강제연행 실태조사 보고서'에는 1939년에서 1945년까지 유바리 탄광에서 조선인 127명이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사망 127건 중 123건은 사인이 '원인 불명'이었다.

석탄 산업이 쇠퇴하면서 유바리 지역은 파산했다. 유바리 탄광에 대해 설명해주는 전시관도 폐관된 상태다. 조선인들이 강제 노역을 했다는 것을 기억할 만한 자료를 찾기가 더 힘들어졌다.

이이즈카 시:

"창씨개명은 조선인이 원한 것" 등 우리나라에서 '망언 정치인'으로 유명한 일본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의 증조부는 1만 명이 넘는 조선인을 강제 노역시킨 전범기업 '아소 그룹'의 창업주다.

'아소 그룹'은 후쿠오카 현(福岡県) 이이즈카 시(飯塚市)에서 모태회사 아소 탄광을 운영하면서 조선인 강제 징용에 앞장섰다. 일본 정부에 노동력이 싸다는 이유로 조선인 강제 연행을 적극적으로 요구했다. 이에 1939~1945년에만 조선인 징용자 1만 623명이 아소 탄광에서 일했고 이 가운데 약 124명이 사망했다.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이 작성한 '아소광업㈜ 피해자에 대한 진상조사 보고서'에 1944년~1945년의 사망자 수가 포함되지 않아 더 많은 사망자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고 적혀 있다.

아소 탄광은 조선인들 사이에서 '착취 지옥'으로 불렸다. 하루 17시간씩 일을 하는 것은 물론, 할당량을 채울 때까지 갱내에서 못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아울러 구타가 일상적이었다. 조선인들은 케이블선·벨트·목도 등으로 얻어맞으며 생사를 넘나들었다.

아소 탄광의 만행은 책으로도 나와 있다. 일본인 사학자 다케우치 야스토(竹內康人)는 지난 2013년 '조사·조선인 강제노동 탄광편'을 출간하면서 일제강점기 조선인 광부의 수난사를 고발했다.

오무타 시:

후쿠오카 현 오무타 시(大牟田市)의 미이케 탄광(三池炭鉱)은 일제강점기 일본 전체 석탄 생산량의 ¼을 차지할 만큼 최대 탄광이었다. 외교부는 지난 2015년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 특별위원회에 1938∼1945년 사이 미이케 탄광 노역을 위해 끌려온 조선인들은 최소 9200여 명이었고, 이 가운데 32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고했다.

전범기업 '미쓰이(三井) 그룹'이 미이케 탄광을 운영했는데, 한반도로 직원을 보내 조선인을 직접 잡아 오게 했다. 조선인들은 죄수나 다름 없었다. 뜨거운 갱내에서 훈도시(褌, 일본의 전통 남성속옷)만 입은 채 하루 2교대로 일했다. 몸이 아파 못 나간다고 말하면, 일본인 감독관이 옷을 다 벗긴 다음 나무 회초리나 벨트 등으로 구타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일본을 점령한 연합군 최고 사령부가 미쓰이 그룹을 해체했다. 1950년대 들어 재결합했지만, 지주 회사 없이 경영하고 있다.

우토로 마을 비행장:

1941년 제2차 세계대전 도중 일본은 조선인 1300여 명을 동원해 혼슈(本州) 교토 부(京都府)에 군 비행장을 건설하려고 했다. 1300여 명 조선인들 가운데 경제적 궁핍을 못 견뎌 일본으로 건너왔다가 강제 노역에 동원된 사람도 포함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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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우지 시(宇治市)에서 6000평가량 불모지에 가건물 숙소를 지어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다 1945년 일본이 패망했고 비행장 건설도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일부가 고국으로 돌아갈 뱃삯을 구하지 못해 이곳에 정착하면서 지금의 우토로 마을이 형성됐다.

우토로 마을에는 여전히 60세대, 180여 명이 일본 국적 취득을 거부한 채 우리나라 국민으로 살고 있다. 지난 2007년 일본 정부가 이들의 거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강제 철거할 것을 요구해 쫓겨날 위기도 있었지만, 우리나라 정부 지원금과 모금 등을 통해 땅 일부를 사들일 수 있었다. 우토로 마을은 지난해 7월부터 재개발을 위해 철거에 들어간 상태로, 2019년 공적 주택 2동이 완공될 예정이다.

나가사키 조선소:

1941년부터 1945년 사이 일본의 태평양 전쟁 시기 군함과 전투기, 어뢰 등 핵심 무기가 나가사키 조선소에서 생산됐다. 규슈 나가사키 현에 있는 조선소로, 이 일대 탄광과 함께 미쓰비시가 운영했다. 대일항쟁기 강제 동원 피해 조사 및 국외 강제 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에서 추정하기로는 조선인 4747명이 나가사키 조선소에서 군함을 만드는 데 동원됐다. 미군과의 수차례 해상 전투에 투입됐던 전함 '무사시(武蔵)'와 일본 특공대 가미카제(神風) 자폭 전술에 이용된 전투기 '제로센(零戰)'이 이곳에서 생산됐다.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 현에 원자폭탄이 투하됐던 날에도 조선인들은 조선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1만여 명이 숨졌다. 원폭 직후 복구 작업에 동원돼 피폭 피해자도 2만 여 명으로 많았다.

야하타 제철소:

후쿠오카 현 기타큐슈시(北九州市])에 있는 야하타(八幡) 제철소는 태평양 전쟁 때 일본 본토 내 철강 생산량 절반을 점유할 정도로 군수산업의 거점이었다. 여기서 생산된 철강으로 군함과 전투기, 어뢰 등이 제작될 수 있었다.

전시 대규모 철강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조선인 3400여 명이 끌려왔고, 노역 중 18명이 사망했다(외교부의 2015년 국회 현안보고 자료). 조선인들은 40㎏짜리 석탄을 운반하거나 쇠를 녹이는 석탄연료를 만드는 등 휴일 없이 하루 12시간 이상 중노동을 했다. 세 끼를 주먹밥 한 덩이로 때웠다. 일본인 감시를 받았기 때문에 부당한 노역에서 도망칠 수도 없었다.

한편, 1970년 우리나라 최초 일관제철소(모든 공정을 갖춘 제철소)인 포항 제철소가 설립되던 때 야하타 제철소의 후신인 '신일철주금(新日鉄住金)'이 철강 생산 기술을 전수했다. 지금도 신일철주금은 포스코와 더불어 세계 철강업계 상위권을 다투고 있다.

[포스코와 신일철주금 관계]

이 밖에도 혼슈 오사카 부(大阪府)나 아이치 현(愛知縣) 나고야 시(名古屋市), 호고 현(兵庫縣) 고베 시(神戶市) 등 일본의 공업 지역 대다수에서 조선인들은 강제 노역을 했다.

강제징용 대하는 일본의 태도

노역했지만 '강제노동'은 아니라는 日 정부

일본 정부는 1965년 우리나라와 일본의 수교를 위해 체결했던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강제 징용 책임문제는 해결됐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진정성 있는 사과도, 법적 책임을 지려고도 하지 않는다.

급기야 지난 2015년 7월 규슈 일대 탄광·항만·제철소 등 23곳을 '메이지 일본 산업혁명 유산'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데 성공했다. 23곳 중 7곳이 강제 징용이 이뤄진 곳이었다. 우리나라 정부는 등재 결정문에 강제 징용 피해 사실을 명시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교묘한 말장난으로 강제성을 회피했다. 기시다 후미오 외무상은 기자회견에서 등재 결정문 속 '강제로 노역을 했다(forced to work)'라는 표현은 '일하게 했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된다고 밝히면서 "원치 않은 노동을 했다 해도 도의적으로 미안할 뿐, 법적 책임은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日, 어두운 과거 숨긴 채 '산업혁명' 과시하려다 제동 걸려]

[日, 세계유산 되자 '물타기']

미국엔 사과한 日 전범기업

지난 2015년 7월 19일, 세계대전 당시 나가사키 현 일대 광업과 조선업 분야에서 강제 징용을 주도했던 일본 전범기업 미쓰비시 그룹이 전쟁 포로 신분으로 노역에 동원됐던 미국인들에게 공식 사과했다. 세계대전 종전 70년 만에 일본 전범기업이 강제 징용 피해자에게 사과한 것은 처음이었다.

기무라 히카루(왼쪽에서 둘째) 미쓰비시 머티리얼 상무가 지난 2015년 7월 1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세계대전 당시 미쓰비시 탄광 등에서 강제 노역한 미국인 제임스 머피(맨 오른쪽)에게 사과하면서 머리를 숙이고 있다.

미쓰비시 그룹 내 대표들이 "미국 징용 피해자 900여 명이 탄광 등에서 혹독한 '강제 노동'을 했다”면서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그러나 이보다 피해 규모가 훨씬 큰 우리나라 피해자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없었다. 한국 강제 징용 피해자 유족들을 대표하는 시민단체는 "미쓰비시가 한국인 피해자를 배제한 채 일부 국가 피해자들한테만 대응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인다"고 비판했다.

[한국엔 침묵하면서… 미국엔 90도 사과한 일본]

일본은 조선인 강제 징용이 당시로선 합법적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조선인 강제 징용 피해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지 않으려고 한다. 조선인이 강제 징용된 지역에 역사적 기록을 남기는 것도 꺼리고 있다.

비행장 건설 노동에 동원됐던 조선인들의 정착지였던 우토로 마을이 철거됐듯, 세월이 지날수록 강제 징용 역사의 흔적이 사라지고 있다. 일본의 어떠한 반성도 듣지 못한 채 이대로 조선인 강제 징용의 피해가 잊히지 않으려면, 우리가 일제강점기 일본의 만행을 기억해두는 것이 첫걸음이다.

□ 그래픽 이은경, 신현정

□ 참고
행정안전부 과거사 관련 업무지원단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재단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

우리 선조의 발자취를 찾아서…
'서경덕 교수와 함께 떠나는 일본 속 역사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