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의 모양이 일본의 해상군함 '도사'를 닮아 '군함도(軍艦島·군칸지마)'라고 불리며 일본어로는 '하시마(端島)'라고 한다. 하시마 섬은 본래 현재의 3분의 1 정도의 면적밖에 안 되는 작은 여울이었다. 그 작은 여울과 주위의 암초 등을 1897년에서 1931년까지 6회의 매립 공사를 통해 확장한 것이 현재의 하시마 섬이다. 크기는 남북으로 약 480m, 동서로 약 160m로, 면적은 약 6.3ha, 해안선의 전체 길이는 약 1,200m다.
하시마 섬은 1890년부터 미쓰비시 재벌이 소유하게 됐다. 석탄 채굴을 위한 공사가 진행됐고, 1916년에는 일본에서 최초로 철근 콘크리트조의 집합주택 '30호동'이 건설됐다.
하시마 탄광에서는 좋은 품질의 '강점탄'이 채굴돼 일본 내에서는 근대화를 이끈 주역으로 평가받는다. 탄광이 전성기를 맞았던 1941년에는 석탄 약 41만 톤을 캐냈다. 탄광 시설, 주택 외에 초중학교, 점포, 병원, 사원, 영화관, 이발소, 미용실, 사교장 등이 있어 섬 안은 완벽한 도시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거주자도 계속 늘어나 1960년에는 인구밀도가 당시 도쿄의 9배나 됐다. 이후, 에너지원이 석유로 전환됨에 따라 1974년 1월 15일 폐산했는데, 약 2,000명까지 줄었던 주민들이 결국 모두 섬을 떠나 무인도가 되었다.
19세기 후반 일제 강점기, 섬 내부에 개발된 '하시마 탄광'은 지하 1km가 넘는 해저 탄광이었다. 1940년대 수많은 조선인들이 이곳에서 강제노역을 했다. 국무총리 산하 기관인 대일항쟁기 강제 동원 피해 조사 및 국외 강제 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의 '사망 기록을 통해 본 하시마 탄광 강제 동원 조선인 사망자 피해 실태 기초 조사(2012)'에 따르면 1943년에서 1945년 사이에만 약 800여 명의 조선인이 이곳에서 강제 노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탄광 안은 매우 좁고 온도가 45도를 넘나들었다. 유독가스가 수시로 분출되며, 가스 폭발 사고에도 노출되었고 공간이 좁아 노동자가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 곳이었다. 게다가 작업 도중 해수가 쏟아져 들어오는 혹독한 환경과 노동조건 때문에 일명 '감옥섬'으로도 불렸다. 조선인과 중국인들은 하시마 섬의 땅속 1,000m까지 파고 들어가 하루 12시간씩 강제 노역을 했다. 이 중 일부는 부적합한 작업 조건으로 인해 병에 걸리거나 탄광 사고, 영양실조 등으로 사망했으며 도망을 시도하다 바다에 빠져 익사하기도 했다.
일본이 하시마 섬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려한다는 사실이 한국에는 2012년에야 알려졌다. 국무총리실 산하 민간위원회가 반대 입장을 밝히고 강제징용 사료를 공개했지만 만족스러운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사이 일본은 3,000쪽이 넘는 방대한 보고서를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에 제출했다.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는 지난 2014년 10월 실사를 거쳐 '메이지(明治) 산업혁명 유산'에 적합 판정을 내렸다.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인 하시마 섬은 2015년 7월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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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무대서 강제노역 동원 첫 인정
일본은 하시마 섬이 산업혁명 성과를 보여준다고 홍보하면서, 조선인 강제노역과 관련된 사실은 부정하거나 표기를 거부해왔다. 논란이 계속되자 일본은 2015년 7월 하시마 탄광 등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결정 회의에서 "일부 시설에 수많은 한국인이 자기 의사에 반해(against their will) 동원돼 가혹한 조건에서 강제로 노역(forced to work)을 했다"고 밝혔다. 일본이 국제무대에서 일제강점기 강제노역 사실을 공식적으로 언급한 것은 처음이었다.
일본은 이 같은 내용을 발표하면서 "해당 시설의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안내센터 설치 등의 조치를 하겠다"고 했다. 일본의 발표 내용은 메이지 산업유산을 세계유산에 등재하는 결정문에 주석(註釋) 형식으로 포함됐다. 위원회는 또 2017년까지 일본이 해당 시설에 이 같은 조치를 한 뒤 관련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했으며, 2018년 회의에서 그 이행 상황을 검토하기로 했다.
한국 홍보 전문가인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나가사키 시(市)에 지속적인 연락을 통해 누구나 조선인 강제징용자 공양탑을 방문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달라고 요청해왔다.
하지만 나가사키 시는 인근 사찰인 금송사가 모든 유골을 이전해 공양탑 밑에는 더 이상 조선인 유골이 없다는 주장만 펼쳤다. 이에 서 교수는 금송사 측에도 연락해 "모든 유골이 다 이전된 게 맞느냐"고 재차 확인했지만, 금송사 측은 "미쓰비시 측이 정확히 알고 있다"고만 답했고, 또 미쓰비시 측에 연락하면 "나가사키 시에서 알지 자신들은 잘 모른다"는 답변만 반복했다.
서 교수는 "다카시마 공양탑 밑에 묻힌 유골 중 군함도(하시마) 탄광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의 유골이 옮겨져 와서 함께 안치되었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메이지 일본 산업혁명 유산
1850년대부터 1910년까지 일본 남부 규슈(九州)
일대에 건설된 탄광·항만·제철소 등 23곳
일본 정부는 1850년대부터 1910년까지 일본 남부 규슈(九州) 일대에 건설된 탄광·항만·제철소 등 23곳을 '메이지 일본 산업혁명 유산'이라 이름 붙이고, 이들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지난 2001년부터 하시마 섬이 등재된 2015년까지 14년간 공들여 왔다. 이 과정에서 일본 정부가 ICOMOS에 제출한 보고서만 3,000쪽 분량에 달한다.
일본 정부는 그동안 하시마 섬 등 23곳의 유적이 모두 1910년 이전에 건설됐기 때문에 일본의 산업혁명 성과를 보여준다고 홍보하며 식민지배나 침략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주장만 되풀이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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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비시
대표적인 일본의 극우 기업
미쓰비시 그룹(三菱グループ · Mitsubishi Group)은 1870년에 창립된 복합기업이다. 현재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해체된 '미쓰비시 재벌'의 계보에 있는 기업을 중심으로 활동 중이다. (미쓰비시항공, 미쓰비시전자, 미쓰비시부동산, 미쓰비시중공업, 미쓰비시항운, 미쓰비시자동차 등) 재벌의 연장선에 있는 기업 연합 중 가장 결속력이 강하다는 의미에서 '조직의 미쓰비시'라고도 불린다. 미쓰이 그룹, 스미토모 그룹과 함께 일본의 3대 재벌 그룹이다.
미쓰비시는 대표적인 일본의 극우 기업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때 군수 기업으로 성장했는데 연행한 조선인들에게 강제 노역을 시켰다. 현재도 극우단체와 정치가를 후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의 극우 언론 '산케이 신문'과 함께, 일본의 대표적인 극우 성향 왜곡 교과서 '제국주의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을 후원하고 있다.
현재 한국 강제 노역 피해자들이 미쓰비시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진행 중이다. 미쓰비시는 전쟁 당시 강제 노동에 동원됐던 미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의 포로와 가족들에게만 정식으로 사과했다. 그러나 한국인 피해자들에게는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대해 오히려 상고장을 내는 등 역사 문제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촐페어라인
독일 서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州) 에센시(市)의 옛 석탄광업 시설
촐페어라인(Zollverein)은 1851년부터 1986년까지 석탄 2억 4,000만t을 생산하며 독일 산업의 '불씨'가 됐던 곳이다. 1930년대 말~1945년에는 나치가 유대인과 전쟁 포로를 강제 노역에 동원했던 장소이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경제 재건의 견인차로서 '라인강의 기적'을 일궈냈다.
이곳은 지난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 일어난 '신즉물주의(전후 혼란상과 실체를 사실적이고 객관적으로 파악해 강렬하게 드러내는 예술 양식)'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자 유럽의 고도 산업화와 중공업 시대를 반영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제는 폐광 시설 안에 수영장과 공연 시설, 박물관 등이 들어서 한 해 평균 150만 명이 찾는 관광지가 됐다.
이날 찾아간 현장의 설명 표지에는 강제 노역에 관한 역사가 이렇게 소개돼 있었다. '강제 노역은 독일 최대 제조업 공장 안에서 특히 잔인하게 이뤄졌다. 루르 공업 단지에서는 6,000명 이상의 유대인이 '유타나시아 프로그램'(유대인 학살)에 따라 살해됐다.'
[獨 '세계유산'은 강제징용 역사를 고해성사하고 있었다]
TV 예능 프로그램서 등장, 많은 사람들이 알게된 곳
지난 2015년, MBC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의 '배달의 무도' 편에서 유재석과 하하 그리고 서경덕 교수가 하시마 섬에 방문한 모습이 방송됐다. 당시 방송에서는 하시마 섬에서 강제노역을 당한 한국인들의 이야기가 전해져 많은 시청자를 울렸다.
당시 하시마 섬에서 강제노역했던 할아버지는 "16살 때 끌려왔다. 창살 없는 감옥에서 살다시피 하고 온 사람이다"라고 말하며 "옹벽 바닥에서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렸다. 배고파서, 쥐나서 못하겠다는 거였다"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할아버지는 제작진이 "일본이 강제징용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하자 "(우리가) 자원해서 왔다고? 하시마 섬에?"라고 말하며 복잡하고 허탈한 표정을 지어 눈길을 끌었다.
영화로 만들어진 '군함도'
영화 '군함도'는 일제강점기 하시마 해저 탄광에서 노동을 착취당한 채 끔찍한 삶을 이어가는 조선인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영화를 만든 류승완 감독은 "제가 역사학자가 아니지만 이런 일에 대해 영화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면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역사적인 책임감과 무게감보다는 본능적이었다. 그곳에 카메라가 가고 배우들이 가고 그곳에서 펼쳐지는 많은 일들이 저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그래서 시작된 영화다"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