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우토로 재일교포마을 SOS

입력 2007.09.14 23:42 | 수정 2007.09.16 03:05

70년 삶의 터전서 쫓겨날 판…

일본 교토(京都)의 우토로 마을의 토지 매매 협상 시한(9월 말)이 다시 다가오고 있다. 이달이 지나면 마침내 해결될지, 또 시한을 연장할지, 이번엔 주민을 강제로 몰아낼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주민들이나 이들을 돕는 민간의 힘이 한계에 부딪힌 듯하다는 것이다.

우토로 마을의 문제는 표면상 명쾌하다. 65세대 203명의 재일동포가 6000평(약 1만9800㎡) 가량의 ‘남의 땅’에서 살고 있는 문제다. 땅 주인은 “돈 주고 땅을 사거나 땅에서 나가라”고 하고, 주민들은 “못 나가겠다”고 버티고 있다.

이 문제는 법적으론 이미 결론이 났다. 2000년 일본 사법부는 최종적으로 땅 주인의 손을 들어줬다. 약 60년간 땅을 일구면서 살아간 주민들의 거주권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 우토로 마을의 모습. 굵은 선으로 표시된 부분이 6000평(약 1만9800㎡) 넓이의 우토로 마을이다. 걸어서 마을을 한바퀴 도는 데 10~15분 걸린다. /우토로국제대핵회의 제공

#자의·타의로 일제 때 이주 

하지만 일본 사회에서 제기되는 재일동포 이슈가 그렇듯, 우토로 문제도 역사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한때 일본에 사는 모든 외국인들이 별 불평 없이 지문을 날인했어도 재일동포의 지문 날인은 차별과 인권의 차원에서 일찌감치 폐지가 논의된 것과 마찬가지다. ‘일본이 일을 시키려고 데려왔으면 최소한의 인권을 보장해야 하지 않느냐’는 논리다. 전후에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한 우토로 마을 역시 이 논리가 적용돼 오늘까지 왔다.

◆주민들은 어떻게 우토로에 왔나

우토로를 ‘강제 징용’과 연관시키는 사람들이 많다. 일본 정부의 징용령에 의해 1941년 시작된 한국인 강제 노동의 희생자(또는 후손들)라는 것이다. 우토로 마을의 형성은 전쟁 당시 군(軍)비행장 건설 노동자들이 불모지였던 이 땅에 가건물 숙소를 지은 것이 출발점이었다. 비행장이 건설되기 시작한 것이 바로 1941년이다. 따라서 강제 징용과 우토로를 연관시키는 선입견이 생겼다.

하지만 이곳에서 일하던 한국인 노동자 1300여명은 당시 징용령에 의해 끌려온 강제징용자가 아니다. 우토로 국제대책회의 홈페이지에는 “몇 가지 오해에 관해 말씀드린다”며 “(우토로 한국인 노동자는) 총칼의 직접적인 무력에 의한 이주가 아니었더라도 고향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 피식민지 국민이 경제적 이유를 포함한 여러 이유로 인해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식민지 종주국으로 이주한 경우”라고 설명했다.

한국 국무총리 산하 ‘일제강점 하 강제동원 피해자 진상규명위원회’도 작년 말 보고서에서 “강제 징용자가 아니라 일본에 거주하던 조선인이 대부분이었다”고 밝혔다. 1930년대 말 자의건, 타의건 식민지 조선의 경제적 궁핍을 피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온 사람들이었다는 얘기다.

▲ 해방 후 우토로 마을 주민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우토로국제대책회의 제공

#남의 땅… 법적으로 거주권 없어 

물론 작년 12월 숨진 우토로 주민 최중규 할아버지처럼 원래 일본 다른 지역의 탄광에 강제 징용 당했다가 훗날 우토로로 이주한 주민들도 있다. 하지만 ‘징용이냐, 아니냐’는 우토로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려다 사실 관계를 명확히 하지 못한 한국 언론의 잘못일 뿐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다. 우토로 주민들은 일본 식민지 정책의 피해자들이며, 끝까지 한국 국적을 버리지 않은 한국인이란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

◆우토로 땅 문제는 왜 일어났나

우토로 땅이 국유지였다면 일찌감치 해결됐을 것이란 의견도 있다. 국유지라면 장기간 거주해온 경우 주민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거주권을 인정해주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토로는 명목상 군비행장 건설을 맡았던 일본국제항공공업(국영기업) 소유였다. 전후 군비행장 건설이 중단된 이후에도 우토로 땅은 기업 소유로 그대로 남았다.

▲ 우토로 마을에 서 있는 입간판. /우토로국제대책회의 제공

#토지매매협상 시한 임박 

이후 우토로 땅은 많은 곡절을 겪었다. 군수회사에서 전후 버스·트럭을 생산하는 자동차 회사로 탈바꿈한 일본국제항공공업은 1962년 닛산(日産)차체로 합병되면서 우토로 땅도 닛산의 소유로 변했다. 닛산차체는 한국에서도 자동차를 파는 닛산자동차 계열사다.

이후 우토로 땅은 개인을 거쳐 1987년 서일본식산(西日本殖産)이란 부동산회사로 넘어가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우토로 주민들과 매각 협상을 벌이는 주체는 서일본식산이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낯 뜨거운 일이 벌어진다. 닛산차체로부터 우토로 땅을 산 뒤 서일본식산에 넘긴 ‘개인’이 우토로의 재일동포 A씨였다. 매각 대금은 3억엔. A씨에게 자금을 빌려준 사람 역시 재일동포 민단 간부였던 B씨였고, 그가 우토로 땅을 사들이기 위해 급조한 회사가 서일본식산이었다. A씨는 닛산에서 우토로 땅을 매입한 직후 “땅을 4억엔에 샀다”고 주장하면서 서일본식산(B씨)에 4억 4500만엔을 받고 되팔았다. 이렇게 동포를 속여 거액을 챙긴 A씨는 야반도주했고, B씨 역시 서일본식산을 1988년 일본인 회사에 매각해 우토로에서 발을 뺐다. 이때 B씨가 얼마에 서일본식산(우토로 땅)을 팔아 얼마의 차익을 남겼는지 분명치 않다.

이런 동포도 있다. 2004년 우토로 소유권은 서일본식산에서 이노우에 마사미(井上正美)라는 개인으로 잠시 옮겨간다. 이노우에는 2005년 5월 국내 언론과 인터뷰에서 자신을 “재일동포 3세”라고 주장하면서 한국 정부에게 “우토로 땅을 5억 5000만엔에 사라”고 요구해 ‘정부 매입론’에 불을 지핀 인물이다. 반기문 당시 외교부 장관이 국회에서 ‘정부 지원’을 언급한 것도 그 해 11월이었다.


#한국정부가 사들이는 방법도 

하지만 일본 사법부는 2006년 9월 이노우에의 소유권은 “무효”라고 최종 판결했다. 계약액이 사회 통념에 비해 너무 적다는 사실을 들어 매매 계약은 서일본식산 직원의 권한 남용에 해당한다고 판결한 것이다. 계약액은 분명치 않지만 당시 일본 신문을 검색하면 ‘2000만엔’이었다는 기사도 있다. 이노우에는 훗날 우토로 땅 매매와 관련, 폭력을 행사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해결 방법은 한국이 사들이는 것

전후 일본 정부가 우토로 땅을 주민들에게 넘기는 것이 근본적인 해법이었다. 국영기업 소유였을 때 국유화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일본 정부는 외면했다. 오히려 우토로 조선인학교를 폐쇄하는 탄압책을 썼다. 우토로 땅이 일단 민간기업으로 매각된 이상 일본 정부가 쓸 수 있는 수단은 별로 없다. 역사적 책임을 지고 땅을 사서 동포에게 나눠줄 가능성도 전혀 없다. 1965년 한·일 협정으로 개인 청구권은 소멸됐다는 입장을 한 번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해결 방법은 한국이 사들이는 것뿐이다. ‘한국’엔 우토로 재일동포 주민, 한국 정부, 한국 국민이 모두 포함된다. 국민들은 지난 3년간 모금 활동을 통해 5억원 정도를 마련했다. 우토로 주민들도 자체 부담금으로 3억엔(24억원) 정도를 준비중이다. 우토로 주민들은 우토로 땅의 시세를 7억엔(57억원) 정도로 파악하고 있다. 나머지 금액을 한국 정부가 대신했으면 하는 것이 주민들의 희망이다. 물론 협상에서 결정될 최종 금액에 따라 각자의 부담이 더 늘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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