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6일(현지 시각) 오전 독일 서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州) 에센시(市)의 옛 석탄광업 시설 '촐페어라인'. 푸른 잔디가 깔린 초대형 단지(100만㎡·약 30만2500평) 안으로 들어섰다. 녹슨 철제 플랜트와 기계 설비 200여개, 벽돌 건물 65동이 시야에 들어왔다. 오랜 광업 단지가 주변과 조화를 이루는 거대한 예술 작품처럼 보였다.
촐페어라인은 1851년부터 1986년까지 석탄 2억4000만t을 생산하며 독일 산업의 '불씨'가 됐던 곳이다. 1930년대 말~1945년에는 나치가 유대인과 전쟁 포로를 강제 노역에 동원했던 장소이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경제 재건의 견인차로서 '라인강의 기적'을 일궈냈다. 135년 세월 동안 역사의 빛과 그늘이 여러 번 교차했던 셈이다.
이곳은 지난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 일어난 '신즉물주의(전후 혼란상과 실체를 사실적이고 객관적으로 파악해 강렬하게 드러내는 예술 양식)'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자 유럽의 고도 산업화와 중공업 시대를 반영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제는 폐광 시설 안에 수영장과 공연 시설, 박물관 등이 들어서 한 해 평균 150만명이 찾는 관광지가 됐다.
이날 찾아간 현장의 설명 표지에는 강제 노역에 관한 역사가 이렇게 소개돼 있었다. '강제 노역은 독일 최대 제조업 공장 안에서 특히 잔인하게 이뤄졌다. 루르 공업 단지에서는 6000명 이상의 유대인이 '유타나시아 프로그램'(유대인 학살)에 따라 살해됐다.'
◇촐페어라인에는 '다윗의 별'이 있었다
"나치 시절 또한 촐페어라인 역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사건입니다. 끔찍한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강제징용 희생자들이 굶주림과 학대에 시달리다 숨진 사실을 전시하고 기억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날 촐페어라인 안의 '루르박물관'에서 만난 해설사 베트람 슈마이어(62)씨 말이다.
세계적 건축가 렘 콜하스(71·네덜란드)가 설계한 박물관 계단 벽면에는 'Zwangsarbeiter(강제 노역자)'라는 단어가 큼직하게 쓰여 있었다. 주황빛 조명이 비치는 계단 통로를 줄지어 내려가는 관람객들은 '강제 노역자 행렬'을 떠올리게 했다.
역사관 '전쟁과 폭력' 코너 앞. 벽면에는 나치에 살해당한 사람들의 정보가 계속 재생되고 있었다. '1923년 뒤스부르크에서 태어난 엘리자베스 하이델베르크, 1941년 리가 게토로 추방된 뒤 스투트호프 수용소에서 사망….'
유대인을 구분 짓는 배지였던 노란색 '다윗의 별', 나치 선전 선동 포스터와 1920~1933년 루르 지역 나치 당원 비율을 분석한 그래프도 있었다. 2008년 세상을 떠난 강제 노역 피해자가 기증한 스케치 2점은 노역자의 짐승 같았던 삶을 묘사했다.
슈마이어씨는 "촐페어라인 역시 보존 작업에 집중하던 1990년대에는 나치 역사를 제대로 언급하지 못했다"며 "하지만 25년에 걸쳐 독일 정부와 지자체가 3억1550만유로(약 3800억원)를 투자하고 역사문화 단지로 탈바꿈하면서 지금처럼 모든 역사를 보여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촐페어라인은 지금도 강제 노역 관련 유물을 추가로 분석하고 있다. 연구가 끝나는 대로 추모 기념물을 설치할 계획이다.
◇등재 당시 주변국 반발 없어
흥미로운 것은 촐페어라인이 2001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당시 주변국 반응이다. 주독 한국 대사관 관계자는 "당시 이미 독일 곳곳에 강제 노역 희생자를 위한 기념 벽과 전시관이 있었고 과거 반성·청산 작업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었기 때문에 촐페어라인의 유산 등재 과정은 외교적 이슈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올해 유네스코 총회 의장국을 맡고 있는 독일은 이런 까닭에 한국·중국의 반발을 사며 역사 갈등을 '자초'하는 일본의 태도를 쉽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독일 최대 일간지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 일요판은 지난 17일 하시마 탄광의 유네스코 등재 시도에 관한 특집 기사를 통해 "일본은 현재 다른 부분들은 양탄자 밑에 감춘 채 근대화 역사의 일부분만 이야기하면서 다른 나라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한다"며 "그래서 여전히 하시마 탄광은 음산한 장소로 남아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