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짓다만 '한창기 박물관'… 왜 겨울 벌판에서 떨고 있을까

입력 2008.11.29 01:48 | 수정 2008.11.29 15:27

출판언론인 평생 모은 컬렉션, 유언따라 전시할 공간 순천시장 수뢰사건 등 우여곡절 끝에 내년 공사 재개

출판언론인 한창기(韓彰璂·1936~ 1997·사진) 사장은 1997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1976년 한글 전용과 가로쓰기를 앞세운 월간지 '뿌리깊은 나무'의 발행인 겸 편집인이었다. 1984년에는 잡지 '샘이 깊은 물'을 창간했다.

한창기 사장이 세상을 떠난 후 남은 이들을 더욱 애통하게 만든 것은 그가 남긴 수집품이었다. 일명 '한창기 컬렉션'으로 불리는 토기, 도자기, 그림, 석물(石物) 수천 점이 아직도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컨테이너로 8대 분량이 넘는다는 얘기도 있었다.

탁월한 심미안으로 이름 높던 그는 "꿈꿔온 일을 위해서라면 돈을 낙엽처럼 태울 줄 알아야 한다"는 신조에 따라 전통미 물씬한 작품을 수집했다.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어루만지던 백자가 병실 침대 밑에서 발견됐을 정도로 그는 전통 문화를 사랑했던 인물이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짓겠다던 박물관은 어떻게 됐을까.

소문만 떠돌다 잊힌 그의 박물관을 25일 찾아갔다. 전남 순천시 낙안면 동내리 낙안읍성 인근 1만3223㎡(4000평) 부지에 짓다 만 박물관이 서 있었다. 2004년 시작된 공사는 2006년 7월 돌연 중단됐다. 건물은 콘크리트 골조만 세워져 있었다. 4개 동 건물 맞은편에는 구례에서 옮겨온 한옥이 보였다. 지상 330㎡(110평), 지하 990㎡(330평) 규모로 건립되던 건물 입구로 철근이 드러나 보였다.

왜 그의 박물관이 콘크리트만 겨우 입고 겨울 벌판에 서 있게 됐을까.
2006년 공사비 부족으로 짓다 만 전남 순천시 낙안면의‘뿌리깊은나무 박물관’. 고(故) 한창기 사장의 유언으로 세워지는 이 박물관은 내년 1월 공사가 재개될 예정이다./ 신정선 기자
한 사장은 평생 독신이었다. 2남2녀 중 장남이었던 그의 유품은 동생 한상훈씨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한상훈씨를 포함한 유언집행인 4인은 박물관 건립을 두고 의견이 갈렸다. 절친한 지인이었던 곽소진 한국저작권센터 회장과 박원순 변호사는 유물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고 박물관 내에 '한창기 갤러리'를 만드는 방법을 추진했다.

그러나 유족들은 단독 박물관을 원했다. "유언집행인들이 2대2로 의견이 갈리면 동생 쪽에 결정권을 준다"던 한 사장의 유언에 따라 한상훈씨가 고향 인근에 단독 박물관을 짓기로 했다. 박물관 건립을 위해 '재단법인 뿌리깊은 나무'도 세웠다.

하지만 그는 이듬해 2월 갑작스럽게 암 진단을 받고 7개월 만에 세상을 떴다. 이후 한 사장의 제수(弟嫂) 차정금(55) 징광문화 대표가 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차 대표는 단독 박물관을 고집한 이유에 대해 "국립박물관 측에서 독자적인 전시공간을 없애버리고 유물을 지하에 넣어버리면 어쩌느냐"라며 "국립박물관에 기증하면 시숙(媤叔)의 흔적이 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유족들이 원한 단독 박물관은 '뿌리깊은 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공사를 시작했다. 순천시가 약속한 보조금 21억원 중 17억3000만원, 재단이 토지와 한옥 매입에 쓴 6억원이 들어갔다.

공사가 난항에 부딪힌 것은 조충훈 전 순천시장이 재단 측으로부터 5000만원을 수뢰한 혐의로 2005년 12월 구속 기소되면서부터다. 조 전 시장 구속 이후 추가 예산 확보가 어려워지면서 사업비 부족으로 공사는 중단됐다.

그렇다면 유물들은 어디에 있을까. 유족들이 낙안읍성 문 앞에 두었던 석물이 도난당하기도 했다. 차 대표는 "유물은 5000여점으로 모처(某處)의 수장고에 함께 보관돼 있다"고 말했다. 수집품 목록에 대해서는 "재단 설립 신청 때 고서와 토기 중심으로 작성한 1차 목록이 있고 2003년 이대 박물관에 의뢰해 대학원생들이 작성한 2차 목록이 있다"고 말했다. "국보급이 다수 포함돼 있지 않느냐"고 묻자 "과장된 얘기다. 한두 점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박물관 공사는 빠르면 내년 1월 재개될 예정이다. 순천시는 "지난 7월 재단이 박물관 토지와 건물을 시(市)에 기부채납(寄附採納)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건물 공사에 6개월, 인테리어에 6개월 정도로 잡고 있다. 추가 공사비는 20억원으로 예상된다. 이름은 '순천시립 뿌리깊은 나무 박물관'으로 바꾸고, 재단 측은 운영만 맡게 될 것으로 보인다.

유언집행인이었던 박원순 변호사는 "11주기가 되도록 박물관이 세워지지 못해 죄스런 마음"이라면서 "하루 빨리 박물관이 문을 열어 한국미를 사랑하던 고인의 높은 뜻이 살아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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