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속 연예인에 대해 과도하게 사생활을 침해하거나 회사 행사에 무상 출연하도록 강제하는 식으로 전속 계약을 맺은 연예기획사 10곳이 공정거래위원회에 적발됐다. (본지 11월 21일자 보도)

"고칠 건 고쳐야죠. 하지만 '노예계약'이란 말은 정말 억울합니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연예인이 노예계약을 하나요. 억울합니다."

연예 매니지먼트업체 A사의 홍보담당자는 '억울하다'는 말을 10번도 넘게 했다. 다른 업체도 마찬가지였다. 한결같이 "공정위가 여론의 지지를 받는 연예인의 편만 들어줬다" "연예계의 실태를 모르는 발언이다"라며 억울해했다. 무엇이 억울하다는 것일까.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미성년자도 지도하지 말까요?

가수 매니지먼트업체 B사는 대표적인 노예계약 업체로 꼽혔다. 계약서에 '을(연예인)은 을의 사생활(신변, 학업, 국적, 병역, 교제, 경제활동, 사회활동, 교통수단 등)과 관련하여 사전에 갑(기획사)에게 상의하여 갑의 지휘감독을 따라야 한다'는 조항 때문이다.

공정위는 이를 '과도한 사생활 침해조항'으로 꼽았다. 하지만 업체 대표는 "삭제가 오히려 더 잘됐다"며 "관리 책임만 있고 문제가 생겼을 때 배상도 못 받는 조항이었는데 연예인 부모들 때문에 유지해온 것"이라고 했다.

B사에는 정식 연예인 이외에 '연습생'이 있다. 가요시장의 주고객이 10대인 만큼 연습생의 3분의 2가 10대다. 이들은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면 기획사로 와 교육을 받는다. 춤·노래·발음을 배우고, 해외시장을 겨냥해 외국어도 배운다. 회사가 학원 기능을 하는 것이다.

이 회사 대표는 "계약서에서 너무 많은 부분을 과도하게 정한 것은 잘못이다. 하지만 평범한 애들만 모인 학교에서도 이성 간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다. 끼 있고 잘생긴 아이들만 모인 곳인데, 회사에서 관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B사는 앞으로도 미성년 연예인의 사생활은 지도할 방침이라고 한다.

변명은 변명일 뿐

가수 매니지먼트업체 C사는 8개 조항을 지적받았다. 홍보와 음원 관리가 문제였다. 회사 관계자는 "대부분 조항을 자진 시정했고 그 내용도 '상호 협의한다'를 넣는 것으로 고쳤다"고 했다. 실제로 '노예계약'이라고 할 만한 조항은 있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이 회사 계약에는 '음악을 인질로 잡는 조항'이 있었다. '을(연예인)이 작사, 작·편곡한 곡을 본인 이외의 갑(기획사)이 제작하는 앨범에 사용할 경우에는 권리를 위임하는 것으로 한다'는 조항이다.

음악평론가 김작가는 "정황상 이 권리를 저작권이라고 본다면 전속 계약을 맺었다고 소속사가 저작권을 좌우하는 것은 작사·작곡가의 기본적인 권리를 침해한 것"이라고 했다. 공정위 심사 후 C사는 '갑과 을이 협의하여 결정한다'라는 단서를 넣었다. 12글자가 더 들어갔을 뿐이지만 의미는 확 달라졌다.

기획사의 자산은 연예인뿐인데

연기자 매니지먼트업체 D사는 5개 조항을 지적받았다. 회사 대표는 "삭제 조항은 항상 회사에 위치를 통보한다는 조항이다. 권리 침해일 수도 있지만 연예 활동에 꼭 필요하다"며 "좋은 배역이 들어왔는데 연락이 안 돼 놓치면 그 손해는 누가 책임지느냐"고 했다.

그는 소속사와 연예인의 계약을 다른 회사에 이전할 수 없도록 한 조항이 시정된 것에 분개했다. 그는 "회사 사정이 나빠지면 인수·합병하거나 주인이 바뀔 수도 있다. 그런데 연예인에 대한 계약을 투자한 회사가 가져갈 수 없다면 누가 투자나 인수를 하겠냐" 고 했다.

문제는 결국 돈

공정위 발표 후 일부 인터넷 사이트에 '신인 연예인의 전속 계약기간이 5년 이상 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노예계약이다'라는 주장이 올라왔다. 연예인들이 스타가 된 후에도 자신이 벌어온 돈의 절반도 받지 못하는 것이 착취라는 얘기다.

가수 매니지먼트업체 E사 관계자는 "연예인들이 내는 수익만 알고 교육비를 몰라서 나온 말"이라고 했다. 그의 회사에서 연습생을 가수로 데뷔시키는 데까지 평균 3~4년에 7000만원 이상이 든다고 한다. 노래와 춤 연습비, 의상, 홍보, 제작, 성형수술비가 포함된 액수다.

그는 "연습생이 가수로 정착하는 비율은 20% 미만이다. 연예사업은 사람을 키우는 일이기 때문에 아무리 재능이 좋아도 실패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래서 계약기간을 늘려야 성공했을 때 투자비를 뽑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엔터테인먼트법학회 최승수 변호사는 "미국은 연예인의 일은 에이전시, 개인 관리는 매니저, 훈련은 연기 학교나 보컬 트레이너가 맡는다. 우리는 기획사가 다 맡기 때문에 뒤죽박죽이 됐다"고 말했다. 미국 기획사는 준비된 연예인을 '띄워주는 것'만 하는데, 한국에서는 교육까지 맡기 때문에 모든 비용을 기획사가 지게 돼 무리한 계약 조항으로 이어졌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