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외교 정책을 총괄하는 양제츠(楊潔篪) 중국 공산당 외교 담당 정치국 위원이 22일 서훈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가진 회담에서 최근 미·중 갈등을 언급하며 한국의 협조를 요청한 것으로 23일 알려졌다. 하지만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방한은 '코로나 상황 안정 이후' 추진하기로 했다. 시 주석 방한 일정이 구체화되기도 전에 미·중 갈등 국면에서 협조해 달라는 중국의 청구서를 받았다는 해석이 나온다.
지난 21일 1박 2일 일정으로 부산을 방문한 양 위원은 22일 서 실장과 부산 해운대 웨스틴조선호텔에서 회담을 가졌다. 강민석 청와대 대변인은 "양 위원은 최근 미·중 관계 현황과 중국 측 입장을 설명했다"고 밝혔다. 최근 미국이 주도하는 화웨이 제재와 탈(脫)중국 공급망 네트워크(EPN), 홍콩보안법과 남중국해 문제 같은 미·중 갈등 현안에서 '한국이 최소한 미국 편에 서지 않길 바란다'는 메시지를 전달했을 것이란 분석이다. 이에 서 실장은 "미·중 간 공영(共榮)과 우호 협력 관계가 평화·번영에 중요하다"는 입장을 전했다.
청와대는 시 주석 방한과 관련해서는 "양측은 코로나 상황이 안정돼 여건이 갖춰지는 대로 조기에 성사시키기로 합의했다"며 "중국 측은 '한국이 시 주석이 우선적으로 방문할 나라'라는 점을 확인했다"고만 밝혔다. 우리 정부가 강조해온 '연내 방한'이란 표현은 빠졌다.
2018년 7월 이후 2년여 만에 이뤄진 양제츠 중국 공산당 정치국 위원의 방한(訪韓)은 미·중 갈등이 더욱 첨예해진 국면에서 이뤄졌다. 양 위원은 방한 직전인 지난 20일 싱가포르에서 리셴룽 총리를 예방한 자리에서도 "중국은 아세안 각국과 손잡고 불안정한 국제 정세를 잠재우고 국제사회 정의와 평화를 수호하길 희망한다"고 했다. 서훈 청와대 안보실장과의 회담도 '우군(友軍) 확보' 목적이 컸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번 회담은 오찬을 포함해 5시간 50분간 진행됐다.
양 위원은 22일 부산 회담에서 서 실장에게 미·중 갈등과 관련해 중국을 지지해달라고 명시적으로 요청하진 않았다. 다만 중국 측 우려를 언급하며 간접적으로 '미국 편에 서지 말아달라'는 뜻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신화통신에 따르면, 양 위원은 회담에서 "중국은 한국과 함께 다자 영역의 국제 협력을 강화하고, 다자주의와 자유무역을 수호하길 원한다"고 했다. 다자주의는 중국이 미국의 행태를 '일방주의'로 비난하며 써온 말이다. 우리 정부는 한쪽을 공개 지지하지 않는 '전략적 모호성'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번 회담에서 우리 측은 교착에 빠진 남북 관계에서 중국의 역할을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실제 회담의 상당 시간을 이 문제에 할애했다고 한다. 남북 보건·방역 협력과 철도 연결 등을 위해 중국에 대화 중재를 요청한 것으로 풀이된다.
양국은 시진핑 주석 방한과 관련해선 '코로나 상황이 안정돼 여건이 갖춰지는 대로 조기에 성사시키기로 합의했다'고만 밝혔다. 중국 정부는 회담 발표문에서 '고위급 교류' 강화 필요성만 언급한 채 시 주석 방한은 적시하지 않았다. 외교가에선 "중국이 시 주석 방한을 지렛대 삼아 미·중 사이에 놓인 한국의 태도에 영향을 미치려는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