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일부 권한을 여동생 김여정 등 소수 측근에게 분산하는 이른바 '위임 통치'에 나선 것은 기존의 만기친람식 절대통치 방식에 적잖은 변화가 있을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다. 전직 통일부 관리는 20일 "일단은 김정은의 업무 부담과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한 한시적 조치로 보인다"며 "만약 제도화할 경우 김정은 이후엔 중국식 집단지도체제로 가는 토대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다만 상당수 전문가들은 "북한 체제 특성상 위임 통치는 불가능하다"며 의문을 나타냈다.

◇김여정·김덕훈·최부일·리병철 주목

국정원은 20일 국회 정보위 보고에서 대남·대미 사업을 비롯해 김정은의 권한을 가장 많이 넘겨받은 인물로 김여정 당중앙위 제1부부장을 꼽았다. 국정원 측은 "사실상 2인자"라고 했다. '김여정 2인자설'은 지난 6월 북한이 '김여정 담화'를 시작으로 3주간 대남 파상 공세를 퍼부을 때도 제기됐다. '내치는 김정은, 외치는 김여정' '김정은 남매의 굿캅·배드캅 역할 분담설' 등이 그것이다. 당시 노동당 통일전선부는 "대남 사업을 총괄하는 제1부부장"이란 표현을 썼다.

김정은(가운데) 북한 국무위원장이 19일 평양에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6차 전원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국가정보원은 20일 국회에서 김정은이 일부 권한을 김여정 등 소수 측근에게 위임했다고 보고했다.

이 밖에 경제는 박봉주 국무위 부위원장과 김덕훈 내각총리, 군사는 최부일 노동당 군정지도부장(군 관리)과 리병철 당중앙군사위 부위원장(무기 개발)이 각각 총괄하는 구조라고 여야 정보위 간사들이 전했다. 인민군 농구선수 출신으로 김정은의 청소년 시절 농구 과외를 해준 인연으로 측근이 된 최부일을 제외하면 테크노크라트(전문 관료) 출신들이다. 화학공장 책임비서 출신인 박봉주는 김정일 집권 시절 총리로 발탁돼 '7·1 경제관리개선 조치'를 주도한 경제통이고, 김덕훈도 기계공장 지배인 출신이다. 공군사령관 출신인 리병철은 북한 핵·미사일 개발의 1등공신이다.

◇힘 실리는 정치국 상무위원회

전문가들은 분야별 총괄역들 가운데 박봉주·김덕훈·리병철이 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회 멤버인 점에 주목하고 있다. 과거 실질적 권한보다는 상징적 지위로 여겨져온 상무위원에게 실질적 힘이 실리고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 중 김덕훈·리병철은 지난 13일 정치국 회의를 통해 새로 상무위원이 됐다. 나머지 상무위원은 김정은과 최룡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다. 이 때문에 정치국 상무위원 7명에게 권력이 분산된 중국 공산당 집단지도체제와 유사성이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다만 외교 소식통은 "북한은 수령에게 권력이 집중돼 있고, 2인자 지위도 혈육(김여정)에게만 허락되는 전형적인 왕조"라며 "세습이 불가능한 중국의 집단지도체제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했다. 정보위 야당 간사인 하태경 의원도 "중국식 집단지도체제는 아니다"라고 했다.

◇한계 봉착한 만기친람식 통치

김정은은 2011년 12월 집권 이후 줄곧 만기친람식 통치를 해왔다. 건설 현장 등에서 "잡초를 뽑아라" "내장재를 바꾸라"며 '깨알 지시'를 내리는 식이었다. 이 같은 통치에 대해선 그간 많은 전문가가 위험성을 지적해 왔다. 건강 문제 등으로 김정은의 통치 활동이 중단될 경우, 의사 결정권자의 부재로 북한의 '국가 기능' 자체가 마비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북한의 핵·미사일 폭주가 본격화한 2016년 이후로는 통치 환경 자체가 크게 바뀌었다. 전방위 대북 제재가 가해지는 등 북한·북핵 문제가 국제 이슈화하며 내치에만 집중할 수 있던 김일성·김정일 시절과는 다른 세상이 된 것이다.

전직 외교부 고위 관리는 "작년 하노이 노딜로 인한 좌절감에 경제난, 코로나 사태까지 겹치며 김정은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게 된 것이 통치 방식에 변화를 준 이유 같다"며 "건강 때문에라도 만기친람식 통치를 계속하기 어려워졌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