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중앙에 반대하는 자는 착취계급의 이익을 대변" [송재윤의 슬픈중국]

입력 2020.08.01 09:00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16>

◇ 음모와 배신, 비열과 잔인…‘막장 드라마’ 권력 투쟁

모든 권력투쟁은 일면 유치하다. 권력자들이야 거대 명분과 숭고한 가치로 권력투쟁의 당위를 선전하지만, 싸움의 진짜 이유는 열등의식, 공격본능 따위인 경우가 적잖다. 1960년대 중반 중공중앙의 권력투쟁은 한 편의 막장 '멜로드라마'를 연상시킨다. 진부한 혁명의 구호들 대신 시기, 질투 등 인간의 어두운 파토스(pathos)가 정치투쟁의 진짜 이유일 수도 있다.

권력자들은 함정을 파고, 음모를 짜고, 배신을 일삼고, 대중을 기만한다. 명예를 걸고 정당하게 결투하는 중세의 기사도는 현실의 정치판에선 기대하기 어렵다. 권력투쟁은 대부분 비열하고, 치졸하고, 지저분하고, 잔인하다. 목숨을 건 권력투쟁에서 승리하면 권력자는 "도덕"의 분칠을 하고 "정의"의 가면을 쓴다. 대중은 권력자의 민낯을 절대로 볼 수가 없다.

마오쩌둥의 주치의 리즈수이가 목숨을 걸고 "마오쩌둥의 사생활"을 기록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에 따르면 "불세출의 영도자" 마오쩌둥 역시 일개 평범한 인간일 뿐이었다. 문화혁명의 정치투쟁은 치정(癡情)과 원한이 뒤섞인 한 편의 멜로드라마를 방불케 한다. 인간 마오쩌둥의 시기심과 증오심이 문화혁명의 직접적 동기였을 수 있다.


<1954년부터 22년 간 마오쩌둥의 개인 의사로 근무했던 리즈수이(李志绥, 1919-1995)는 미국 망명 후 '마오쩌둥의 사생활'을 집필했다. 직접 썼다 파기했던 일기를 되살린 이 기록은 최고 권력자 마오의 섭생, 생활습관, 여자관계, 건강상태뿐만 아니라 중요한 정치적 사건을 둘러싼 권력투쟁의 진상을 기록한 심층적 증언록이다.>
<1954년부터 22년 간 마오쩌둥의 개인 의사로 근무했던 리즈수이(李志绥, 1919-1995)는 미국 망명 후 "마오쩌둥의 사생활"을 집필했다. 직접 썼다 파기했던 일기를 되살린 이 기록은 최고 권력자 마오의 섭생, 생활습관, 여자관계, 건강상태뿐만 아니라 중요한 정치적 사건을 둘러싼 권력투쟁의 진상을 기록한 심층적 증언록이다.>


◇ 권력 놓고 ‘대리 투쟁’ 벌인 마오·린뱌오·캉성의 아내들

마오쩌둥, 린뱌오, 캉성은 모두 정치투쟁의 대리인으로 "와이프"를 전면에 내 세우거나 뒤에서 은밀히 이용했다. 마오는 펑전을 잡기 위한 계략으로 장칭을 상하이에 보내서 문단의 좌파 비평가들과 결탁시켰다. 린뱌오는 군부의 거물 뤄루이칭(羅瑞卿, 1906-1978)을 치기 위해 예췬(葉群, 1917-1971)으로 하여금 뤄의 심복 샤오샹롱(肖向榮, 1910-1976)를 공격하게 했다. 캉성은 베이징대학에 차오이오우(曹軼歐, 1903-1989)를 밀파해서 좌익 지식인들을 규합해 문혁의 직접적 도화선이 된 "최초의 마르크시스트 대자보"를 작성하게 했다.

와이프을 이용한 점에선 국가주석 류샤오치(劉少奇, 1898-1969)도 예외가 아니었다. 1966년 6월 왕광메이(王光美1921-2006)는 류의 뜻에 따라 공작조(工作組)를 이끌고 칭화대학에 들어갔다. 이후 그녀는 홍위병 집회에 불려나가 집요하게 성적 모욕을 당했는데, 장칭(江靑, 1914-1991)의 질투 및 증오와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 장칭은 1930년대 상하이 은막의 스타로서 옌안에서 최고영도자 마오쩌둥의 정부인이 된 인물이다. 장칭은 7세 연하의 미인 왕광메이가 영부인이 되어 해외순방을 다니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인도네시아 순방 시 양장에 진주목걸이를 했다는 이유로 홍위병들은 왕광메이의 목에 탁구공 목걸이를 달고 집회에 끌고 다니며 공공연히 성적(性的) 모욕을 가했다.


<1962년 인도네시아 영부인 하르티니 수카르노를 접견하는 장면. 왼쪽부터 마오쩌둥, 장칭, 그리고 국가주석 류샤오치의 부인 왕광메이. 왕광메이에 대한 장칭의 질시는 문혁 멜로드라마의 심리적 배경이 된다./ 공공부문>
<1962년 인도네시아 영부인 하르티니 수카르노를 접견하는 장면. 왼쪽부터 마오쩌둥, 장칭, 그리고 국가주석 류샤오치의 부인 왕광메이. 왕광메이에 대한 장칭의 질시는 문혁 멜로드라마의 심리적 배경이 된다./ 공공부문>


중공중앙 최고위 부부들은 거의 대부분 1940년대 옌안에서 만나 자유연애를 통해 결혼한 커플들이었다. 문혁 시절 그들이 펼친 “쌍쌍투쟁”은 숱한 가십거리를 남겼다. 1966년 5월 20일 중공중앙 확대회의에 배포된 린뱌오 명의의 문건이 단연 압권이다.

“나는 증명한다. 1. 나와 혼인할 때, 예췬은 순수한 처녀였으며 혼인 후에도 그녀는 줄곧 정조를 지켰다. 2. 예췬과 왕스웨이는 사랑한 적이 전혀 없다. 3. 라오후(老虎, 아들 리궈 [立果]의 별명)와 더우더우(豆豆, 딸 리헝[立衡]의 별명)는 모두 나와 예췬이 친자녀들이다. 4. 얜웨이빙(嚴慰冰, 1918-1986)의 반혁명적 서신에 적힌 내용은 모두 요설이다. 린뱌오, 1966년 5월 14일.”

왕스웨이는 연안 시절 정풍운동에 희생당한 비운의 문인이었다. 얜웨이빙은 중앙 선전부장 루딩이의 와이프인데, 린뱌오에게 예췬의 부정한 행실을 폭로하는 수십 통의 익명 서신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루딩이와 린뱌오의 대립이 부인들 사이의 지저분한 싸움으로 표출됐다는 이야기다.

문혁 당시엔 극비였으나 치정에 얽힌 중공중앙의 권력투쟁은 이후 널리 인구에 회자되는 가십거리가 되었다. 권력자들은 근엄한 얼굴로 정치적 비장미를 연출하지만, 대중은 권력자들의 뒤를 캐묻고 그들의 위선을 조롱하고 희화한다. 어느 사회에서나 술자리 가십은 민심의 풍향계라 여겨진다. 독재정권 아래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린뱌오의 가족사진. 왼쪽부터, 린뱌오, 린리궈, 예췬, 린리헝. 1971년 내란혐의에 연루된 린뱌오는 가족과 함께 모스크바로 망명하다 사망한다. 이 중 린리헝만 현재 생존해 있다.>
<린뱌오의 가족사진. 왼쪽부터, 린뱌오, 린리궈, 예췬, 린리헝. 1971년 내란혐의에 연루된 린뱌오는 가족과 함께 모스크바로 망명하다 사망한다. 이 중 린리헝만 현재 생존해 있다.>


◇ 최고 권력자에는 반대 못하는 ‘조반유리’, 모든 반란을 진압하라는 뜻

1966년 5월 25일 베이징 대학 식당 벽에 붙은 한 장의 대자보가 붙는다. 베이징대 철학과 당위원회 서기 녜위안쯔 등 7인의 서명이 붙은 대자보는 문화혁명이 대중운동으로 비화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일개 대학의 식당 벽에 붙은 대자보 한 장이 대체 어떻게 전국적 혁명의 도화선이 될 수가 있나? 물론 관영매체의 힘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베이징 시장 펑전이 숙청된 이후, 관영매체는 최고 영도자 마오쩌둥의 손아귀에 온전히 들어왔다.

6월 1일 항주에서 마오쩌둥은 문제의 대자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훈시한다. “신화사를 통해 이 대자보의 전문을 방송하고, 전국의 모든 일간지, 주간지 등에 그대로 발표해야 하오. 그럴 필요가 십분 있소. 베이징 대학에 이런 반동의 보루가 있다면, 바로 거기서 반동의 타파를 시작할 수 있소!” 흥분한 마오쩌둥은 동시에 캉성에 전화를 걸어서 이 대자보야 말로 "1960년대 베이징공사의 선언이며, 파리코뮌보다도 그 의의가 더 크다"고 소리쳤다.


<1966년 8월 16일 톈안먼 광장에서 녜위안쯔 및 좌파인텔리들을 맞이하는 마오쩌둥의 모습. 왼쪽 앞 단발의 안경 낀 여성이 녜위안쯔/ 공공부문>
<1966년 8월 16일 톈안먼 광장에서 녜위안쯔 및 좌파인텔리들을 맞이하는 마오쩌둥의 모습. 왼쪽 앞 단발의 안경 낀 여성이 녜위안쯔/ 공공부문>


6월 1일 중앙방송은 녜위안쯔의 대자보를 집중 조명한다. 중앙의 관영매체에 대서특필되자 지방의 모든 신문이 곧 따라왔다. 전국의 이목이 거의 동시에 베이징 대학에 나타난 한 장의 대자보에 쏠리게 되었다. 곧이어 전국의 유수 대학들과 중고교에도 대자보의 물결이 이어졌다. 그해, 6월, 비로소 마오쩌둥이 밤을 지새우며 기획한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인민일보 사설엔 이런 구절이 등장했다. "마오주석에 반대하고, 마오쩌둥 사상에 반대하고, 마오주석과 당중앙의 지시에 반대하는 모든 자는 착취계급의 이익을 대표한다." 마오쩌둥의 보위가 곧 혁명이라는 선언이다. 바로 이 점에 대해선 현대 중국의 자유언론인 양지성(楊繼繩, 1940- )은 일갈한다.

“어떤 이는 마오가 문혁 시기 군중에게 '민주'를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저 사설의 필자는 '민주'에 명확한 생사(生死)의 한계선을 긋고 있다. 마오주석, 마오쩌둥 사상 및 당중앙은 절대로 반대할 수가 없다. 사람들은 오로지 무릎을 꿇어야만 조반(造反)할 수 있었다. 마오의 면전에 무릎을 꿇어야만 조반이 가능했다.”

문화혁명의 키워드는 단연 "조반"이었다. 모든 권위에 저항한다며 일어난 홍위병을 향해 마오는 그 유명한 "조반유리(造反有理)!"를 부르짖었다. 반란에 합당한 이유가 있다는 말이다. 조반의 사전적 의미는 "반란을 일으키다, 반역하다, 반항하다" 정도이다. 반란이란 최고 권력에 대한 저항일 때 의미가 있다. "무릎을 꿇어야만 '조반할 수 있다면" 결국 마오의 호위무사가 되란 말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형태의 반란을 진압하라는 주장에 가깝다. 결국 문혁 당시의 "조반"이란 1950년대 내내 진행됐던 진반(鎭反)운동 내지는 숙반(肅反)운동과 다르지 않다. 마오가 제창한 '인민민주독재'의 원칙에 따라 인민이 적인(敵人, 인민의 적)을 억압하는 것!

문제는 이 대자보가 마오의 오른팔 캉성이 와이프 차오이오우를 사주해서 만들어낸 기획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녜위안쯔는 2010년 90세의 나이로 그 대자보가 누구의 외압도 없이 7인이 합심하여 자발적으로 작성한 자발적 격문이라 주장했지만, 1966년 초 이미 차오이오는 공작조(工作組)를 이끌고 베이징대학에 들어가 활약하고 있었다. 중공중앙이 "5.16통지"를 발표한 직후, 군중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마오가 요구하고 캉성이 기획하고 차오이오우가 실행에 옮긴 "조반"의 멜로드라마였다. <계속>


<문혁 당시 대자보를 작성하는 베이징 사범대학의 학생들. 큰 글씨로 쓴 '폭력혁명만세!'라는 구호가 인상적이다./ 공공부문>
<문혁 당시 대자보를 작성하는 베이징 사범대학의 학생들. 큰 글씨로 쓴 "폭력혁명만세!"라는 구호가 인상적이다./ 공공부문>


※ 필자 송재윤(51)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는 최근 ‘슬픈 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까치)를 출간했다. 중국 최현대사를 다룬 3부작 "슬픈 중국" 시리즈의 제 1권이다. 이번에 연재하는 ‘문화혁명 이야기’는 2권에 해당한다. 송 교수는 학술 서적 외에 국적과 개인의 정체성을 다룬 영문소설 "Yoshiko's Flags" (Quattro Books, 2018)의 저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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