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속을 정말 빨리 밟았어요. 이걸 좋다고 해야 할지….”

지난 23일 정오 무렵, 패트릭 아드빈쿨라(39·필리핀)씨가 4년 10개월 한국 직장 생활을 끝내고 필리핀으로 돌아가기 위해 인천공항 제2 터미널 B카운터에 들어섰다. 앞에서 출국 절차를 기다리는 승객은 5명뿐이었다. 발열 검사를 간단히 마친 뒤 카운터에서 짐을 부치고 항공권을 받기까지 걸린 시간은 10분. 그는 "예전 같으면 40분 이상 짐을 끌면서 기다렸을 것"이라고 했다.

지난 23일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의 한산한 모습. ① 공항 내 단기 주차장 ② 입국장 밖에 마련된 코로나 19 개방형 선별진료소 ③ 대한항공 카운터에서 출국 절차를 밟는 외국인 ④ 굳게 닫힌 출국 절차 카운터들.

인천공항 2터미널에는 대한항공과 외국 항공사 10곳의 출국 절차를 치르는 카운터가 200곳에 이른다. 이날 오전 11시쯤 공항 한 바퀴를 돌아보니 문이 열린 카운터는 5개에 불과했다. 카운터를 다 열어도 승객으로 북새통을 이루던 여름 성수기는 온데간데없었다.

'Eat, Drink, Shop, Fly(먹고 마시고 쇼핑하고 비행하라).'

여객 터미널의 매력이 집중된 저 문구는 이제 사어(死語)가 되고 말았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탑승객을 대부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인천공항공사에 따르면 지난해 5월 하루 평균 인천공항으로 출·입국한 사람은 18만7754명. 올해 5월 이용객은 약 98%가 사라진 4449명에 그쳤다. 이날 공항에서 일반 승객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미국 라스베이거스, 이탈리아 로마, 스페인 마드리드 등으로 가는 노선은 지난 3월부터 운항이 중단됐다.

코로나 사태가 덮치기 전에는 인천공항 직원(정규직·자회사 포함) 1만1300여 명을 포함해 승무원 등 항공사 직원, 면세점·식당·은행 등에서 일하는 사람을 합쳐 7만7000여 명이 이곳에서 일했다. 이용객이 50분의 1로 축소된 지금 '인천공항 사람들'은 어떻게 버티고 있을까.

월급 600만원에서 220만원으로

15년 차 승무원 김모씨는 매일 아침 아이 둘을 돌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초등학생인 두 아이의 온라인 수업을 챙기고, 학원에 데려다 준다. 3월 초 미국 애틀랜타에서 들어오는 비행을 끝으로 이달 7일까지 석 달쯤 쉬었다. 그리고 간신히 다시 비행기를 탔다. 김포~제주 국내선에 하루 투입됐고, 베트남을 다녀왔다. 이달에 할당된 비행 총시간은 약 50시간. 코로나 이전 한 달 평균 비행 시간(95시간)의 절반 수준이다. 이달 말 미국 LA에 다녀오면 또 최소 석 달을 쉬어야 한다.

당연히 급여도 줄었다. 코로나 이전엔 한 달 평균 600만원가량이 통장에 들어왔다. 그런데 지난달 수령액은 220만원 수준. 이마저도 정부가 항공업계 종사자에게 고용유지지원금을 지급한 덕이다. 지원금이 끊길 수 있는 10월 이후가 문제다. 김씨는 "코로나를 둘러싼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면, 급여를 한 푼도 못 받거나 아예 구조 조정으로 잘릴까 봐 불안해하는 승무원이 많다"고 했다.

대한항공 객실 승무원은 6000여 명에 이른다. 12~15명이 한 팀으로, 모두 380여개 팀이 있다. 코로나가 터진 뒤부터는 90여 팀이 석 달여를 주기로 비행에 투입된다. 나머지는 일하지 않는다. 승무원이 2700여 명인 아시아나항공도 지난해와 비교하면 국제선 운항률은 9%에 불과해 승무원의 약 20%만 비행에 나서고 있다. 저비용 항공사(LCC)는 사태가 더 심각하다. 한 저비용 항공사 승무원 김모(34)씨는 "4월부터 지금까지 비행을 못 했고 급여도 못 받았다"고 했다.

파일럿(조종사)은 기종에 따라 희비가 엇갈린다. 대형 항공기로 분류하는 B777 기종을 조종하는 김모씨는 "지난 3월 이후 조종간을 잡아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국내 대형 항공사는 안전을 고려해 각 조종사에게 한 기종만 다루도록 하고 있다. 쏘나타를 몰 줄 안다고 해서 그랜저 운전을 맡기진 않는다는 뜻이다. A380이나 B777 등 주로 국제선에 투입하는 대형 항공기 면허를 가진 조종사들은 최근 해외로 나가는 승객이 거의 없다 보니 더 큰 고통을 겪고 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은 '하늘 위의 호텔'이라고 하는 초대형 항공기 A380을 각각 10대, 6대 보유하고 있다. 두 항공사에서 A380 조종간을 잡는 조종사는 200여 명과 130여 명이지만 이 기종 운항은 지난 4월부터 완전히 멈췄다. 일감이 사라진 것이다. B747-400이나 B777-300 같은 대형 기종도 운항 횟수가 반 토막 났다. 반대로 A330, B737 등 중소형 기종 조종사는 사정이 낫다. 제주 등 국내선 승객 수요가 조금씩 살아나면서 코로나 이전 대비 비행 시간의 70~80%를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기내식도 20분의 1만 생산

출국장에서 곧 하늘로 올라갈 여객기 일정을 알려주는 스크린도 덜 바빠졌다. 이날 인천공항에서 이륙한 비행기는 115편(여객기 33편). 1년 전 6월 23일 출발 편수 558편(여객기 522편)에 비해 4분의 3가량 줄었다. 여객기에 화물만 싣고 떠났다 승객을 태워 돌아오는 노선도 여럿 있다.

기내식 생산을 담당하는 직원들도 절반 넘게 휴직에 들어갔다. '하늘 위 만찬'을 먹을 탑승객이 없기 때문이다. 160여 명이 기내식을 조리하던 대한항공에서는 코로나 사태 이후 60여 명 정도만 일한다. 기내식 생산량도 매일 7만5000식에서 하루 3400식(6월 평균)으로 급감했다. 외부 업체에 위탁하는 아시아나항공도 기내식 숫자가 하루 3만4000여 식에서 1300여 식으로 줄었다.

면세점 등 인천공항 입주 업체들도 타격을 받았다. 인천공항 제2 터미널 화장품 면세점에서 일하는 김모씨는 "4월부터 이틀에 하루는 화장품을 단 한 개도 못 팔고 있다"고 말했다. 롯데면세점은 코로나 이전 인천공항 내 면세점 운영으로 하루 매출 10억원을 올렸다. 월 200억원 수준인 입점비와 1000여 명(브랜드 소속 직원 포함)인 직원 인건비를 겨우 충당할 수 있었다. 코로나 이후에는 하루 매출액이 3000만원에 불과해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한 면세점 관계자는 "정확한 규모를 밝힐 순 없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수준"이라고 했다.

한 음료 매장은 도넛이나 음료를 사 가던 손님이 하루 평균 600명이었는데, 지금은 100여 명 수준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일하는 김모씨는 "나는 본사 소속이라 괜찮다"고 했다.

도배 알바, 이참에 결혼 준비도

인천공항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생계 유지에 나선다. 한 대형 항공사의 출국 카운터에서 일하던 A(44)씨는 중장비나 지게차 면허를 딸 준비하고 있다. 그는 "아이들이 중학생이 돼 가는데 쉬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으냐"고 했다. 이들은 정부가 구직자의 학원비를 지원해주는 내일배움카드(1년에 최고 200만원 지원)를 주로 활용한다. 최근에 인기를 끄는 일은 '도배'라고 한다. 한 50대 초반 직원은 "어렵지 않게 배울 수 있고 하루에 30만원은 벌 수 있다고 해 40~50대 항공사 직원 사이에서 인기"라고 했다. 일부 남자 직원은 쿠팡 같은 물류 회사나 배달 대행 업체에서 일한다. 겸직을 금지하는 규정 때문에 반드시 아르바이트를 찾는다.

승무원 등 여직원들은 바리스타 제빵·제과 기술을 배우는 경우가 많다. 일부 승무원은 이참에 결혼하려고 마음먹기도 한다. 지난 3월 결혼 정보 업체에 가입했다는 20대 승무원 B씨는 "비행이 많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는데 시간이 난 김에 결혼도 고려하고 있다"고 했다.

이들과 다른 처지인 인천공항 사람들이 있다. 인천공항공사 소속 직원들(1만1300여명)이다. 항공사·면세점 직원들은 월급이 축나고 고용 불안에 떨지만, 이들에게는 먼 나라 얘기다. 넉 달째 휴직 중인 한 항공사 직원은 “아무리 승객이 줄어도 꼬박꼬박 월급이 나오는 인천공항공사 직원을 보면 기분이 묘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