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악과 싸운다" 투사의 정치가 대재앙을 불렀다 [송재윤의 슬픈 중국]

입력 2020.05.23 09:30

과학기술 분야도 투사가 득세, 야만적 정치투쟁 계속
경제성장과 개선책 도모하는 관리자형 지도자는 몰락

송재윤의 슬픈 중국 <6회>

◇투사형과 관리자형의 싸움…매번 투사가 관리자 무너뜨려

문화혁명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 하버드대 맥파쿼(Roderick MacFarquhar, 1930 - ) 교수는 중공지도자들을 크게 투사(鬪士, militant)와 관리자(管理者, manager) 두 유형으로 나눠서 분석한다.

투사형 지도자들은 정치투쟁을 일삼아 권력의 기반을 닦고, 넓히고, 굳힌다. 그들은 숭고한 이념을 제시하고, 정치적 의제를 설정하고, 혁명의 드라마를 연출한다. 인간집단을 인민과 적인(敵人), 아군과 적군, 혁명세력과 반혁명세력 등으로 양분한다. 자신들이 절대(絶對) 선(善)의 편에 서서 절대 악(惡)과 투쟁한다고 주장한다. 사냥개처럼 정적(政敵)을 물어뜯고, 피의 숙청을 감행한다. 현실정치에서 붉은 투사들은 강력한 권력을 발휘하곤 한다. 인민의 목을 조이는 공산 유토피아의 고삐가 그들의 손에 꼭 쥐여져 있기 때문이다.

반면 관리자형 지도자들은 크고 작은 정책을 입안하고, 행정상의 실무를 처리한다. 경제성장을 도모하고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한다. 그들은 현실적 한계를 점검하고 점진적 개선책을 모색한다. 논쟁을 통해 이념적 정당성을 인정받기 보단, 현실에서 정책적 성과를 입증해 사후적으로 “수행적 합법성(performative legitimacy)”을 획득하려 한다.

중국현대사 최고의 투사형 지도자는 단연 마오쩌둥이다. 문화혁명을 주동했던 중공중앙 부주석 캉성(康生, 1898-1975), 국방부장관 린뱌오(林彪, 1907-1971)와 장칭(江靑, 1914-1991)을 위시한 “4인방” 또한 대표적인 투사들이다.

관리자형 지도자로는 국가주석 류샤오치(劉少奇, 1898-1969),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 중앙서기처 총서기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 경제관료 천윈(陳雲, 1905-1992) 등을 꼽을 수 있다.

투사와 관리자가 맞붙어 싸우면 어떻게 될까? 과연 누가 이길까? 대약진운동에서 문화혁명으로 이어지는 중국의 정치사를 돌아보면, 매번 투사가 관리자를 잡아 패고 무너뜨리는 야만적인 정치투쟁의 연속이었다. 왜 관리자들은 늘 붉은 투사의 공격을 받고 그로기 상태로 내몰렸을까? 중국정치사의 수수께끼다.


“무산계급 문화대혁명 승리 만세!” “마오주석을 대표로 하는 무산계급 혁명노선 승리 만세!” 왼쪽부터 캉성, 저우언라이, 마오쩌둥, 린뱌오, 천보다(陳伯達, 1904-1989, 마오의 비서), 장칭/ chineseposters.net
“무산계급 문화대혁명 승리 만세!” “마오주석을 대표로 하는 무산계급 혁명노선 승리 만세!” 왼쪽부터 캉성, 저우언라이, 마오쩌둥, 린뱌오, 천보다(陳伯達, 1904-1989, 마오의 비서), 장칭/ chineseposters.net


◇타고난 투사 마오쩌둥, 잠재적 비판자까지 색출 “극한까지 가야한다”

마오는 타고난 투사였다. 1950년대 중후반 그는 정책의 반대자들뿐만 아니라 잠재적 비판자들까지 모두 색출해서 격리시켜버렸다. 이어서 그는 특유의 대중노선으로 전 인민을 이끌고 “정신승리”의 늪으로 서슴없이 들어갔다.

1927년 3월 서른다섯 살의 공산주의자 마오는 “후난(湖南)성 농민운동 고찰보고”를 발표했다. 중국의 농민운동에서 공산혁명의 가능성을 발견한 마오는 “오류를 바로 잡기 위해선 한계를 넘어 극한까지 가야 한다!”는 묘한 말을 남긴다. 수천 년 “봉건제도”의 모순을 일소하려면 극좌(極左)노선의 맨 끝까지 밀고가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 말 속에는 이미 특유의 혁명적 조급증이 드러나 있다.

그가 제시한 “대중운동의 법칙”에 따르면, 노동자와 농민은 불굴의 혁명정신과 삶의 지혜를 체득한 무산계급(無産階級)이다. 마오는 무산계급의 혁명정신이 강력한 지도력과 만나면 대약진의 경제성장이 가능해진다고 믿었다. 그가 제창했던 대중노선(大衆路線)의 핵심이다.

마오는 프롤레타리아 정신이야말로 최고의 철학, 문학, 과학기술을 낳는 창의성의 원천이라 믿었다. 일례로 1957년 중국문단의 작가는 1천 명 미만이었는데, 1958년 전국적으로 20만 명의 작가들이 양성되었다. 엄격한 문학수업을 거친 전문작가들 대신에 삶의 경험을 진솔한 언어로 표현한 모든 사람들에 작가의 칭호를 부여했다. 과학·기술 분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오는 전문가 대신 붉은 투사를 선호했다.


'마오주석을 꼭 잡고서 큰 바람, 큰 파도를 헤치며 전진하자!” 문화혁명 당시 마오의 인격숭배를 보여주는 포스터. 최고영도자와 인민의 직접적 결합이 강조되고 있다. /PUBLIC DOMAIN
"마오주석을 꼭 잡고서 큰 바람, 큰 파도를 헤치며 전진하자!” 문화혁명 당시 마오의 인격숭배를 보여주는 포스터. 최고영도자와 인민의 직접적 결합이 강조되고 있다. /PUBLIC DOMAIN


마오의 이론에 따르면 지식계의 위계질서는 최상위에 노동자·농민이, 그 아래 기술자와 과학자가, 또 그 아래 사회과학자와 인문학자가 위치하고 있는 역(逆)피라미드의 구조였다. 과학·기술자 중에서도 기술자가 맨 위를 차지하고, 수학이나 이론물리학 등 순수과학은 맨 아래를 차지했다. 순수이론 과학자, 탐미주의 문학가, 실존주의 철학자 등등은 반(反)혁명의 멍에를 써야만 했다.

마오가 동경했던 혁명적 무산계급은 이념적 허구일 뿐이었다. 홉스가 간파했듯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이며,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러한 인간을 향해 마오는 이타심을 발휘해 혁명에 희생하라 요구했다. 그 결과는 인류사 최악의 대기근이었다.


◇이상과 현실의 분열…짧았던 관리자형 전성시대

1962년에서 1965년까지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은 유감없이 국가적 위기를 책임지고 타개하는 관리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그들이 추진했던 경제회복운동은 머잖아 큰 효력을 발휘했다. 몇 가지 경제지표를 살펴보자.

1960년 대기근의 악재로 최저점(1억 4천 5백만 톤)까지 떨어졌던 농업생산량은 1965년에 이르면 1957년 수준까지 회복되었다. 사탕수수 등 비(非)곡물 생산량도 대약진 이전 수준까지 회복했다. 곡식은 10%, 면화는 50%, 채유(菜油) 생산량은 60%나 늘어났다. 육류 및 재목의 생산량도 1957년보다 40% 증가했다. 1965년 3천 3백만 헥타르에 관개사업이 이뤄졌고, 또한 그 중 25%의 농지는 기계 펌프로 관수됐다.


왼쪽부터 덩샤오핑, 류샤오치, 저우언라이. 대약진 이후 신경제정책을 주도적으로 추진했던 인물들. 팔에 “홍위병” 밴드를 차고 있음을 보면, 문화혁명이 막 시작된 1966년 여름으로 추정된다. /PUBLIC DOMAIN
왼쪽부터 덩샤오핑, 류샤오치, 저우언라이. 대약진 이후 신경제정책을 주도적으로 추진했던 인물들. 팔에 “홍위병” 밴드를 차고 있음을 보면, 문화혁명이 막 시작된 1966년 여름으로 추정된다. /PUBLIC DOMAIN


산업부문의 성과도 두드러졌다. 1963-1965년 경공업은 연평균 27%, 중공업은 17%의 증가량을 보였다. 1965년 철, 전기, 시멘트, 중기의 생산량은 1957년의 두 배 수준에 이르렀다. 소비재 생산량도 현격히 늘어났다. 재봉기계는 네 배, 자전거는 두 배 더 많이 생산됐다. 석유 및 석유화학 생산부문도 큰 성과를 보였다. 1965년 국내총생산량은 1957년보다 29%, 1962년보다 51% 증가했다.

“투사의 정치”는 국민경제는 망쳤지만, “관리의 리더십”은 경제를 살렸다. 가시적 성과를 냈음에도 류와 덩은 왜 보다 적극적으로 신경제정책을 옹호하지 못했을까? 류와 덩을 단순히 합리적 관리자일 뿐이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들도 뼛속 깊숙이 공산혁명의 투사였다. 실용적으로 “백묘(白描)”의 방법을 채택했을 뿐이지만, 이념적으로 그들은 모두 “흑묘(黑苗)”를 자처했다.

지난 주 언급했듯 5백 30만의 직·접적 피해자를 낳은 사회주의교육운동(1963-1966)은 마오쩌둥이 제창했다. 붉은 투사 마오는 스스로의 경제적 실정을 가리기 위해 다시금 계급투쟁의 기치를 들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류샤오치는 사회주의교육운동을 직접 주재하고 나선다. 그 과정에서 류와 마오가 갈라섰다는 주장도 있지만, 실제로 문헌을 살펴보면 류가 주도적으로 잔혹한 숙청의 칼날을 휘둘렀음이 분명해 보인다.

1962-1966년 류샤오치는 경제정책의 방향을 우측으로 선회했다. 동시에 그는 계급투쟁의 깃발을 들고 지방의 간부들을 숙청하는 붉은 투사의 면모를 과시했다. 수정주의의 오명을 벗기 위한 방어적 제스처였을까? 주자파(走資派)란 낙인을 피하기 위한 연극이었을까? 아니, 그보다는 류샤오치가 강한 신념의 공산주의자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공산주의자의 신념을 견지한 채로 그는 신경제정책을 실시했다. 대약진운동의 처참한 실패 후에도 류샤오치는 공산주의 이념 자체에 대해선 회의하지 않았다. 고작 실용주의라는 허술한 명분으로 경제적 이윤동기를 슬그머니 인정했을 뿐이었다. 이론과 실천의 괴리였다. 이상과 현실의 분열이었다. 그 점이 바로 류샤오치 최대의 패착이었다. <계속>


“류샤오치, 투항하지 않으면 그를 멸망시켜라!” 문화혁명 당시 류샤오치를 비판하는 포스터. 소련 수정주의의 추종자로 묘사하기 위해 류샤오치의 코를 크게 그려 놓았다./ chineseposters.net
“류샤오치, 투항하지 않으면 그를 멸망시켜라!” 문화혁명 당시 류샤오치를 비판하는 포스터. 소련 수정주의의 추종자로 묘사하기 위해 류샤오치의 코를 크게 그려 놓았다./ chineseposter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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