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 4월 이규원이 울릉도 감찰사로 파견되었다. 같은 달 30일 울릉도에 도착, 12일간 울릉도와 독도를 조사했다. 첫날 전라도 흥양사람들을 만났다. ‘막을 치고 머물고 있는 사람이 있어 상세히 물으니 전라도 흥양 삼도사람 김재근으로 격졸 21명을 이끌고 배를 만들고 미역을 딴다고 말했다.’
그가 울릉도에 있었던 사람들을 집계했더니 모두 218명이었다. 조선인이 140명, 왜인이 78명이었다. 조선인은 전라도 흥양(삼도, 초도)과 낙안 115명, 강원도 평해(현재 울진) 14명, 경상도 경주·영일·함양 10명, 경기도 파주 1명이었다.
이곳에서 전라도사람들은 주로 배를 만들고 미역을 땄다. 강원도가 전라도 사람들과 비슷했고, 타지는 약초채취와 대나무 벌채를 했다. 왜인들은 벌목을 했다. 초도와 삼도는 여수 거문도 부속 섬들이다. 이들은 선주를 중심으로 조직을 이뤄서 활동하고 있었다. 삼도는 두 팀, 초도는 세 팀이었다. 팀당 13명에서 24명까지였다. 이들은 일정기간 울릉도에 머물면서 어로활동을 하고 새로 건조한 배에 건조한 해산물을 싣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남해안 어민들이 계절별로 공간을 달리하면서 어로활동을 해왔다. 무리를 이뤄 서해안 쪽으로, 또는 동해안 쪽으로 갔다. 지금도 거문도(초도, 삼도 등)에 가면 구전이 이어지고 있다. 선대(先代)의 울릉도 어로활동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노래로도 전한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에이야아 술비야, 울릉도로 나는 간다 에이야아 술비야…좋은 나무 탐진 미역 에이야아 술비야…’(술비 소리)
거문도와 울릉도는 지리적으로 멀지만, 동떨어져 있지 않았다. 남해안 어민들이 멀리 울릉도까지 진출한 것은 자신들의 거주지에서 나오는 산출이 부족했던 것과 관련이 있었다.
이규원 감찰사가 울릉도를 답사하고 정부에 보고한 ‘울릉도검찰일기’와 전라도 구전은 우리나라의 해양경영의 실상과 국토범위를 전하는 것이어서 귀중하게 평가받고 있다.
이경엽 목포대교수(민속학·도서문화연구원장)가 이규원의 기록과 해당 지역의 구전을 보충하여 ‘교류(交流)의 관점에서 ‘울릉도와 거문도-남해안 어민들의 울릉도 진출기록과 기억’을 작성했다. 이 교수는 민속학을 연구하면서 ‘섬’에 주목해왔다. 적응, 교류, 경제활동, 연행(演行)의 핵심어(열쇠말)로 섬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았다. 생태환경에 대한 적응과 섬생활(적응), 육지와 섬 그리고 해역간 교류의 양상(교류), 어촌의 경제활동과 민속 전승의 배경(경제활동), 예술적 표현과 기억에 대한 맥락적 해석(연행)으로 섬을 봐야 한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이 관점에서 내놓은 결과물이 ‘네 가지 열쇠말로 읽는 섬의 민속학’(민속원)이다.
저자는 이 저작에서 강진 옹기배 사공, 가거도 멸치잡이, 완도 생일도의 어장과 공동체신앙, 완도 청산도 구들장논, 남해안 원거리 어로활동, 섬으로 간 남사당패와 상례놀이, 영광 칠산해역의 마을굿 변모, 시흥 새우개 사람들의 마을공동체와 도당제, 파시(波市)의 연행, 고흥 월포농악과 제의적 연행, 해남 미황사의 군고패 등의 다양한 사례를 집약했다.
그는 이 책에서 고립된 곳과 고형문화의 잔존지역으로 보는 관점, 중앙정치와 유배인의 입장에서 보는 관점, 대중문화에 담긴 타자화된 이미지와 개발주의자의 관점에서 벗어나, 교류와 내·외부의 관계를 아우르는 관점에서 연구해야 한다고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