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통신장비 업체 화웨이(華爲)는 16일 오전 사내 인터넷 게시판에 수십 발의 총탄에 구멍이 뚫린 소련 전투기가 비행하는 사진〈사진〉을 올렸다. 미국 상무부가 지난 15일(현지 시각) 미국 기술을 활용하는 기업들이 화웨이에 반도체를 공급하려면 미국의 허가를 받도록 하는 제재 조치를 한 직후에 올라온 사진이다. 전투기 아래에는 '상처 없이 야성(野性)을 기를 수 없을 터. 영웅은 자고로 고난 속에 태어나는 법'이란 글귀도 새겨져 있었다. 화웨이는 왜 이런 사진을 올렸을까.
화웨이가 공개한 사진은 1944년 2차 세계대전에서 수십 발의 총탄을 맞고도 무사 귀환한 소련 전투기 IL-2의 비행 모습을 담은 것이다.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혼신을 다해 노력하면 살아남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진 속 전투기 조종사는 유대계 소련인 겐리흐 호프만(1922~1995)이다. 전쟁 기간 146차례 비행해 총 600발의 총탄이 그의 전투기에 날아들었는데도 생존했다. IL-2는 낮게 날기 때문에 격추되는 경우가 잦았던 것을 감안하면 기적 같은 일이었다. 호프만은 1944년 10월 26일 '소련 영웅' 칭호를 받았다.
인민해방군 장교 출신인 런정페이 화웨이 회장은 줄곧 호프만의 전투기를 화웨이의 상징으로 여겼다. 2018년부터 미국의 화웨이 압박이 심화하자 화웨이를 호프만 전투기에 빗대며 내부 결속을 다져왔다. 지난해 5월 런 회장의 딸 멍완저우가 캐나다에서 구금됐을 때나 지난해 7월 미국 정부가 화웨이 제재를 완화하려면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법안이 발의됐을 때도 화웨이는 호프만의 전투기 사진을 인터넷에 공개한 뒤에 '미국과 끝까지 싸우겠다'는 입장을 냈다. 호프만의 전투기 사진은 화웨이의 결사항전 의지를 표현하는 도구인 셈이다. 최근에는 화웨이의 엽서, 컵과 같은 기념품에도 호프만의 전투기가 새겨졌다.
런 회장의 경영 철학이 호프만의 전투기를 회사 상징으로 삼게 했다는 분석도 있다. 장교 출신인 런 회장은 기업 경영을 군(軍) 지휘하듯 한 것으로 유명하다. '경영은 전쟁'이라 여기고, 야전 침대를 사무실에 갖다 놓고 일했다. 런 회장은 마오쩌둥의 군사 전술인 '농촌으로 도시 포위 전략'을 화웨이의 시장 확보 전략으로 빌려 썼다. 이는 상대적으로 낙후한 지역에서부터 세력을 키운 다음에 중심 지역을 포위하듯 세력을 넓혀나간다는 뜻이다. 실제 화웨이는 중국 내 낙후한 지역이나 아프리카 등 제3세계에서 우선적으로 시장 점유율을 높이는 전략을 썼다. 또 화웨이가 기업 이념으로 내세운 '늑대 정신'은 상명하복식 군대 문화를 중시하는 의미도 담겨 있다. 우연한 일이긴 하지만 런 회장이 태어난 날은 호프만이 '소련 영웅' 칭호를 받기 하루 전인 1944년 10월 25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