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기정 청와대 정무수석이 1일 정부 주최 세미나에서 '전 국민 고용보험제'를 언급한 것은 고용보험 제도에 관한 민주노총 등 노동계의 강력한 요구와 청와대 내부의 '친(親)노동' 코드가 복합적으로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은 이날 "코로나 사태로 지원을 받은 기업에 대해선 해고 금지를 의무화해야 한다"며 "전 국민에게 고용보험을 도입하고 입법 전까지 '한시적 실업 기금'을 조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노총은 이날 민주당과 정책협의회를 갖고 "해고 남용 금지와 총고용 보장을 위해 공동으로 협력하고 실천한다"는 내용의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청와대와 여당이 전 국민 고용보험 확대를 위한 구체적 방안이나 재원 계획도 없이 '노동절 선물'부터 안겼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 내에서도 "중장기 과제이지 아직 실현 가능한 게 아니다"란 얘기가 나왔다.
청와대와 여권 내부에선 최근 코로나 사태에 따른 고용 위기를 겪으면서 고용 안전망 강화 목소리가 커진 것으로 알려졌다. 고용보험 대상이 전체 근로자(약 2700만명)의 50%에 불과한 상황에서, 자영업자·건설일용직·특수고용노동자·프리랜서 등이 코로나 고용 위기에 노출됐기 때문이다. 이에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 13일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여전히 고용보험의 사각지대가 많다"며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자영업자와 플랫폼 노동자, 특수고용노동자 등 고용보험 미가입자에 대한 지원책 마련에도 심혈을 기울여 달라"고 했다. 정부는 지난달 비상경제회의를 통해 영세 자영업자 등 고용보험 미가입자 총 93만명에게 최대 150만원을 지원하는 지원책을 내놓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강 수석은 이날 논란이 큰 '전 국민 고용보험제'라는 카드까지 언급했다. 구체적인 추진 스케줄이나 재원에 관한 설명은 한마디도 없었다. 이 때문에 노동계를 의식한 립서비스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야당은 "노동절을 맞아 대통령 직속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참여를 거부하고 있는 민주노총에 산타클로스식 선물을 준 것"이라고 비판했다.
실제 청와대와 정부·여당은 당장 전 국민 고용보험제를 추진하겠다는 입장은 아닌 것으로 알려졌다. 강 수석도 이날 "향후 방향 등은 앞으로 차차 논의해야 할 문제로, 국회에 계류된 관련 법안의 통과가 우선"이라고 했다.
현재 국회 환경노동위에는 고용보험 적용 대상을 확대하는 법안 10여개가 계류돼 있다. 2018년 11월엔 한정애 등 민주당 의원 16명이 고용보험 적용 범위를 특수형태 근로 종사자와 예술인까지 늘리는 법안을 발의했다. 특수형태 근로 종사자는 보험 설계사, 학습지 교사, 골프장 캐디, 퀵서비스 기사, 대리운전 기사 등을 포함한다. 이 밖에 임신을 이유로 휴직한 근로자에게 육아휴직과 같은 처우를 보장하는 법안, 실업급여 적용 대상을 넓히는 법안 등도 다수 계류돼 있다.
민주당은 "전 국민 고용보험제는 큰 틀의 방향일 뿐 현재 구체적으로 추진 중인 사항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청와대가 이를 '중기 과제'로 언급한 만큼 21대 국회에서 고용보험 대상 확대 관련법 통과에 이어 '전 국민 고용보험제'까지 본격 추진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전문가들이 가장 큰 문제로 지적하는 것은 재원이다. 현 체제에선 근로자와 사측이 월 급여의 일정 비율로 절반씩 고용보험료를 부담한다. 지난해 근로복지공단이 거둬들인 고용보험료는 11조4054억원이다. 고용보험 가입 범위를 취업자 전체로 확대할 경우 수조원을 신규 가입 근로자와 사업자가 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보험료를 부담하기 어려운 취약 계층이 많고, 보험료를 분담해야 할 사용자가 없는 경우도 많다. 이는 결국 국민 세금으로 메워야 할 공산이 크다. 민주노총은 재원으로 '정부의 과감한 재정 투입'과 '재벌(대기업) 규모에 따른 누진세' 등을 주장하고 있다.
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가 이날 언급한 '한국형 실업 부조'를 확대하면 정부 부담은 더욱 커진다. 당장 실업급여의 재원인 고용보험기금은 지난해 2조원 넘는 적자를 기록했다. 고용보험기금 적립금은 2017년 10조2544억원에서 지난해 7조3532억원으로 2년 만에 2조9012억원이나 줄었다. 올해는 경기 둔화와 코로나 여파로 적자 폭이 더욱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고용보험료율 인상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