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서 안되고 저래서 안되고…정부 발표를 그대로 믿은 내가 바보인가요.”
정부가 지난주에 발표한 ‘소상공인 신속 지원 대책’에 따라 1일부터 소상공인들은 신용등급에 따라 1~3등급은 시중은행에서, 4~6등급은 기업은행에서 연이율 1.5%짜리 소상공인 긴급 대출을 신청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이날 일부 소상공인들 사이에는 은행 창구에서 대출 거절과 문전박대를 당했다는 불만이 폭발했다.
은행 지점을 찾는 상당수의 소상공인이 “아직 대출 준비가 안 됐다’는 황당한 대답을 듣거나, 정부가 지정한 신용평가사이트 나이스지키미(www.credit.co.kr)의 신용등급은 인정 안 한다는 이유로, 또 기존 대출이 있다는 이유로 대출에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법인 사업자는 안 되고 개인 사업자만 된다’, ‘개업한 지 6개월 이상만 가능하다’는 등, 정책 수요자 입장에서는 쉽게 납득을 못 하는 거절 이유도 나오고 있다. 소상공인들은 “부자 소상공인만 은행에서 긴급 대출을 받을 수 있는 거냐”는 반응이 나온다.
우선 상당수 은행 지점들이 소상공인 긴급 대출을 실행할 준비가 안 됐다는 이야기가 많다. 소상공인 A씨는 일산의 한 기업은행 지점에 갔다가 “오늘부터 시행 아니다”며 “6일쯤 홀짝제로 가능할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가 ‘오늘부터 가능하다고 뉴스에 나왔는데 무슨 소리냐’고 항변하자 “그건 언론이 앞서간 것이다”라는 답변을 들었다. 또 한 시중은행을 찾은 B씨는 “아직 지침이 안 내려왔느니 다음 주에 다시 오라고 하더라”며 “정부가 지난주에 발표한 내용을 아직도 ‘지침이 안 내려왔다’고 하니 기가 막혀 뭐라 대꾸할 말도 안 나왔다”고 했다.
기존 대출이 있는 경우와 개인이 아닌 법인 사업자는 긴급 자금 대출이 안 된다는 맹점도 드러났다. 심지어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한 개인 사업자도 개업한지 6개월 이상이 되어야만 대출을 받을 수 있다. C씨는 “기업은행에 문의하니 기존 신보나 기보에 3000만원 이상 대출 보증 있으면 대출 안된다”는 대답을 받았다고 했고, D씨는 “(대출받으려면) 국세·지방세부터 완납하라고 해 70만원을 빌려 내고 왔더니 그제야 ‘3년 전에 빌린 소상공인 대출이 남아있다’고 거절당했다”라고 했다. E씨는 “법인은 해당 안 되고, 개인 사업자는 개업 후 6개월 이상만 대출 가능하다고 하더라”며 “분함을 꾹 삼키고 은행 창구에서 일어났다”고 말했다.
정부 지정기관을 통해 확인한 신용등급과 은행의 자체 신용 등급이 달라 대출이 거절당하는 황당한 경우도 속출하고 있다. 소상공인 F씨는 소진공 센터를 먼저 찾아갔다가 “오늘부터 신용등급에 따라 지원 창구가 달라진다”는 안내를 받고, 그 자리에서 정부 지정 나이스지키미를 통해 신용등급이 1등급임을 확인, 주거래 은행에 찾아갔다. 그런데 은행에서는 “등급이 BBB라 대출이 안 된다”는 고 답변을 들었다. 그는 ‘어떻게 안 되겠느냐’고 통사정을 했지만, 은행 직원은 “타 은행 대출이 있어서 어차피 대출 안 된다”며 결국 대출 신청을 받지 않았다.
또 G씨는 “서류 챙겨 은행을 방문해 ‘나이스지키미에서 1등급인 것 확인하고 왔다’고 하니 ‘그건 외부 등급이고 은행 등급은 따로 정한다’면서 ‘(여기서 못 해주니) 주거래은행 가서 하라’는 대답을 들었다”고 했다. 그가 “여기가 주거래 은행인데 무슨 소리냐”고 따지자 은행 측은 마지 못 해 서류 접수는 해줬다고 한다. 하지만 여러 번 “어차피 대출 어려울 것”이란 이야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결국 신용등급 3등급 이상에, 기존 대출 없이, 법인 아닌 개인 사업자로, 개업한 지 6개월 이상 된 극히 일부의 소상공인만 은행 대출을 받을 수 있는 셈이다. 소상공인 F씨는 “‘도대체 이런 까다로운 조건을 채우는 소상공인이 있느냐’고 물으니 은행 직원도 ‘실제로 많은 분들이 (대출 조건에) 해당이 안 돼 나도 안타깝다’고 하더라”고 했다.
소상공인 H씨는 “도대체 그런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시키는 소상공인이 있는지 모르겠다”며 “그렇게 조건이 좋은 사람이 왜 소상공인 대출을 받겠는가, 결국 부자들만 대출해 주는 것인가, 도대체 누구를 위한 대출인가”라고 반문했다. I씨는 “대출 상담 여러 개 중 소상공인 대출 상담 창구는 단 한 개고, 다른 창구 직원들은 전혀 무관심하더라”며 “분위기를 보니 은행에서는 초저금리상품 대출해주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 같아 그냥 돌아왔다”고 했다.
은행들이 이렇게 소상공인 긴급 대출에 소극적인 것은 금리를 연 1.5% 수준으로 낮추기 위한 ‘금리 할인’의 일부를 은행이 자체적으로 부담해야 하고, 이 대출을 실행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인건비와 대출 관리비)도 높아 사실상 손실을 보는 대출 상품이기 때문이다.
금융권 고위 관계자는 “최근 금융사들의 실적이 곤두박질 치는 상황에서, 소상공인 긴급 대출을 받아주면 줄수록 은행 실적에는 악영향”이라며 “은행들이 툭하면 ‘관치논란’에 시달릴 만큼 정부 눈치를 보긴 하지만, 주주 이익을 고려해야 하는 민간 금융기관 입장에서 무턱대고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라고 했다.
특히 이런 ‘역마진 대출’이 늘면, 은행 지점들이 실적 평가에서 점수를 까먹게 된다. 이 때문에 지점장부터 아래 차·과장까지 “가능한 하지 말자”는 분위기가 된다는 것이다. 정부에서 요구하니 위에서는 “하겠다”고 해놓고 현장에서는 알아서 꽁무니를 빼는 일이 벌어지는 셈이다.
결국 긴급 자금 대출에 실패한 자영업자들은 저축은행과 등록 대부업체 등 제2금융권을 기웃거리고 있다. 담보가 있으면 연 10% 미만의 금리도 가능하지만, 보통은 연 14~19%대의 고금리를 내야 한다. 하지만 빠르면 당일, 늦어도 하루 이틀 내에 돈을 빌릴 수 있다.
한 일본계 금융회사 임원은 “신용등급이 높은 소상공인들의 대출 문의가 늘어난 것은 사실”이라며 “본격적으로 이쪽 고객군에 대출을 확대할지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높은 금리의 돈을 쓰면 순식간에 신용등급이 뚝뚝 떨어지게 된다. 정부의 미숙한 대책이 위기에 처한 일부 소상공인을 저신용자의 늪으로 몰아넣게 될 위험성마저 불거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