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 구석구석에 눈이 달렸다. 폭력적인 남자친구가 잠든 틈을 타 도망치려 하는 여자는 일단 집안의 CCTV부터 끄기 시작한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남자 친구의 눈을 피해 집을 탈출하는 장면부터 관객을 휘어잡는다. 가까스로 그에게서 벗어난 줄 알았는데 여전히 어디선가 그가 지켜보는 느낌이 든다.
영화 ‘인비저블 맨’이 4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기대작들이 개봉을 미룬 탓이기도 하지만, 운 때문만은 아니다. 국내에서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영화 ‘1917’을 누른 데다 전 세계적으로 제작비 대비 17배의 수익을 올렸다. 고전을 절묘하게 비튼 해석이 현대 사회의 공포를 건드린다.
SF고전 ‘투명인간’의 재해석
‘인비저블 맨’은 우리말로 보이지 않는 인간, 즉 투명인간이다. 투명인간 캐릭터의 조상 격인 허버트 조지 웰즈의 소설 ‘투명인간’(1897)을 재해석했다. 소설에서는 미친 과학자가 주인공이었다면 영화에선 그에게 스토킹 당하는 여자친구가 주인공이다.
웰즈의 소설 속 투명인간 ‘닥터 그리핀’은 빛의 굴절률을 조절할 수 있는 약품을 발명해 자신의 몸에 실험한다. 그리핀은 자신도 같은 인간이라고 주장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무서워하고 혐오한다. 그리핀은 보이지 않는 육체를 이용해 온갖 범죄를 저지르다 참혹한 최후를 맞는다.
소설의 정점은 마지막 순간이다. 악행을 일삼던 그리핀이 사람들의 공격을 받고 죽는 순간. 보이지 않았던 정맥과 동맥, 뼈가 하나씩 드러나면서 묘한 쾌감이 든다. 영화에서도 그렇다. 투명인간에게 쫓기던 여주인공이 흰색 페인트를 얼굴에 확 끼얹었을 때,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 짜릿함을 준다.
수백개의 카메라가 온몸을 뒤덮는 투명인간 슈트
영화에선 약을 먹는 대신 슈트를 입는다. 뒤집어쓰면 투명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검은 슈트는 생김새만으로도 위압적이다. 수백개의 작은 카메라가 온몸을 뒤덮은 형태로 온몸에 눈이 100개 달린 그리스 신화의 괴물 ‘아르고스’가 떠오른다. 카메라로 뒤를 촬영한 모습을 전면에 투사해 착시 효과를 일으키는 것이다.
이 투명인간이 무서운 이유는 단순히 보이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영화는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보다는 어디서든 나를 볼 수 있다는 공포에 집중한다. 원작 소설에서 투명인간은 화를 못 참는 미치광이 과학자였다면, 영화 속에선 교묘하게 여자친구를 조종하고 통제하는 소시오패스로 변화했다.
몰래 훔쳐보는 눈… 현대사회의 공포
이는 누군가 나를 훔쳐볼 수 있다는 현실의 공포와 맞닿아 있다. 최근 ‘n번방’ 사건으로 분노가 들끓고 있다. 어플의 익명성을 이용해 미성년자 성 착취 영상을 돌려보고 퍼뜨렸다고 한다. 돌려본 n번방 가입자들은 모두 투명인간처럼 누군가의 고통을 훔쳐보며 즐거워했을 것이다. 영화 속 투명인간 슈트가 현실화된다면 어떻게 악용될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온몸이 카메라로 덮인 투명인간의 스토킹에 시달리던 세실리아는 “나에게도 강인함이 필요하다”고 울먹거리고 스스로 그 말을 실천한다. 영화에선 강해진 여주인공의 복수가 쾌감을 주지만, 피해자가 강인해져야 하는 현실은 참담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