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석이 정말 트로트 영재냐고요? 솔직히 노래를 잘하는 건 아닌데 처음 듣는 반주에 박자를 척척 맞추더라고요. 가수도 아닌데 그 정도면 훌륭해서 영재라고 했죠."
유산슬(유재석)의 데뷔 곡으로 인기를 끈 '합정역 5번 출구'의 작곡가 '박토벤' 박현우(78)씨가 그의 작곡 사무실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스트롯'에 이어 '미스터트롯'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트로트가 다시 한 번 국민 음악으로 자리매김했다. 중장년층뿐만 아니라 2030세대도 트로트를 듣고 부르며 열광하고 있다. 여기엔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트로트 가수 '유산슬'로 변신한 방송인 유재석의 역할도 컸다.
박씨는 방송에서 유재석에게 호통을 치면서도 15분 만에 곡을 만들어내는 천재적 면모를 보였다. 그런 그에게 베토벤과 같은 천재라는 의미에서 '박토벤'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슬픈 가사가 흥겹고 경쾌한 멜로디를 타고 흘러 묘한 반전 매력으로 순식간에 인기를 얻었다. 이 방송 이후 박씨는 다른 예능 프로그램들과 광고에도 출연하고 있다. 박씨는 "유재석은 어딜 가도 대접받는 사람일 텐데 그런 그를 혼내면서 연습시키는 모습을 사람들이 재미있게 봐준 것 같다"고 했다.
갑자기 유명해진 것 같지만, 박씨는 대중음악계에서 잔뼈가 굵은 작곡가다. 1968년 은방울자매의 '포항 아가씨'를 시작으로 정훈희의 '스잔나'(1971), 박우철의 '천 리 먼 길'(1973) 등을 만들어내며 이름을 날렸다. 임권택 감독 영화 '비나리는 선창가(1970)' 등 120여 편의 영화음악도 만들었다. 현재는 한국영화음악협회 이사장과 한국음악저작권협회 이사를 맡고 있다.
유년 시절부터 자연스레 음악을 접했다. 경북 안동의 고향 집 뒤편에 극장이 있었는데, 가난한 가정 형편 탓에 거기 가지는 못하고 흘러나오는 유행가를 따라 부르며 음악을 배웠다고 한다.
목공소에서 주워온 합판에 줄자로 건반을 그려 넣고 머릿속으로 음을 상상하며 가짜 피아노를 치기도 했다. 음악학원에서 청소를 해주면서 강사가 자리를 비울 때마다 바이올린과 아코디언 같은 악기를 익혔다.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지만 음악을 듣고 연주를 할 때마다 너무 황홀했어요. 제대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작곡을 시작했는데, 당시엔 저작권 개념이 약해 돈벌이가 쉽진 않았어요. 그래도 그 황홀한 기분을 놓지 못해 지금까지 해오고 있습니다."
최근 트로트 인기가 커지면서 박씨에게 들어오는 작곡 의뢰도 10배 이상 많아졌다고 한다. 박씨는 "요즘 트로트는 젊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세미와 발라드 트로트가 대세"라며 "계속해서 젊은 가수들이 발굴되고 있기 때문에 인기가 쉽게 사그러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팔순을 앞둔 박씨는 "늙은 작곡가는 '뽕짝'만 할 것이란 편견을 깨고 싶다"며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죽을 때가 돼서 병상에 누워서도 펜을 잡을 수만 있다면 작곡을 하겠다는 다짐이다. "내가 가더라도 사람들이 내 노래를 불러주고 기억해주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