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와 신문, 나의 아침은 그렇게 시작된다. 조선일보가 주는 묵직한 질량감이 좋다. 은빛 고기 떼를 건져 올리는 어부의 느낌이 그럴까. 한가득 담은 세상의 정보 속에서 가끔은 어린 시절 기억도 퍼덕거린다. 아득한 중학생 때 이어령 선생의 글을 읽고 외웠다. 가끔 프랑스 파리 특파원이 보내는 이국적 풍경으로 꿈을 달랬다. 처음 컬러판을 선보였을 때 '조선일보'는 외국 대학 캠퍼스 전경을 실어 보냈다.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그걸 오려 벽에 붙였다. 기어이 가보리라. 선우휘 주필, 그의 일필휘지에 감격해 주필이 되리라 단단히 마음먹었다.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에 충격을 받아 기자 되기를 포기하고 대학으로 발길을 돌렸다. 컬러판에 나왔던 그 대학으로 갔고 교수가 됐다.

"선우휘 주필의 일필휘지에 감격해 언론인의 꿈을 꾸기도 했다"는 송호근 교수는 칼럼니스트이자 대한민국 미래 청사진을 그리는 '2020 한국 프로젝트'의 전문가로 조선일보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2002년, 조선일보가 '2020 한국 프로젝트'에 기획단장으로 나를 초청했다. 한창 대통령 선거 유세로 시끄러울 때, 조선일보는 '20년 후 한국' 청사진을 그려 이정표로 삼고자 했다. 각 분야 최고 전문가 40여 명이 모였는데 오세정, 염재호 교수가 동업자였다. 백지에 멋진 청사진을 그린 신나는 작업이었다.

정권이 바뀌면서 나는 잠시 칼럼을 중단하고 문학 글을 썼다. '문학의 숲'. 60~70년대 조선일보에 실린 빛나는 단편 글, 신춘문예, 수필, 시평을 열독한 보답치고는 너무 큰 모험이었다. 김수영에서 김훈까지 사회적 문학비평이랄까 그런 것을 시도했다. 2년의 문학 수업은 즐거웠다. 묵혀두는 게 아까워 '나타샤와 자작나무'라는 책을 냈는데, 안 팔렸다. 그 '인연의 징표'로 서가 한복판에 꽂혀 있다.

대선 캠페인이 한창이던 2007년 6월, 고(故) 노무현 대통령께 글을 올렸다. '서생(書生)이 올리는 상소문'. 특별히 1면에 실렸다. 은근히 걱정이 됐는데 아무 일 없었다. 올해가 2020년, 아무튼 그 청사진은 얼마나 실현됐을까. 코로나와 사투를 벌이는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뭐가 잘못됐는지 다시 들춰봐야겠다. 조선일보와 맺은 인연은 질기다. 평생 갈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