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미상, 기도용 호두, 1510~1525년경, 회양목, 13.2×9.4cm, 런던 영국박물관 소장.

호두알처럼 한 손에 쏙 들어오는 동그란 나뭇조각이다. 가운데 꽃 한 송이를 두고 레이스처럼 화려하게 조각한 껍데기를 아래위로 열면 양면이 모두 얇은 덮개로 닫혀 있다. 위쪽에는 요셉과 성모 마리아의 결혼식이, 아래쪽에는 대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잉태 소식을 알리는 수태고지 장면이 있다. 수태고지를 앞으로 당겨 덮개를 열면, 그 뒷면에 예수 탄생이 조각돼 있다. 거친 바닥에 누워 사방으로 빛을 발하는 작은 아기, 아름답게 미소 짓는 마리아와 한 손으로 조심스레 촛불을 가린 요셉의 표정이 놀랍도록 세밀하다. 그 위, 즉 아래쪽 반구에서는 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갈보리 언덕을 오른다. 위쪽 덮개를 양옆으로 열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수난이 드러난다. 소란스러운 군중, 힘없이 쓰러지는 성모 마리아, 예수의 옆구리로 창을 겨눈 병사, 두 도둑과 함께 책형을 당하는 예수 뒤로도 끝을 알 수 없이 깊고 어두운 공간이 펼쳐진다. 실제로는 2㎝가 채 안 되는 깊이인데도 그렇다.

기독교의 처음과 끝, 즉 예수의 탄생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희생까지 손바닥 위에서 차례로 열어 볼 수 있는 이 조각은 16세기 세밀화와 공예 전통이 발달했던 지금의 네덜란드 지역에서 제작한 ‘기도용 호두’다. 사람들은 이를 묵주처럼 목에 걸거나 허리띠에 장신구처럼 매달고 다녔다. 실제 호두는 아니고 결이 곱고 밀도가 높아 미세한 조각이 가능한 회양목으로 만들었지만, 처음엔 정말 호두에서 시작됐을지 모른다. 신심이 깊은 누군가가 동그란 호두 껍데기 속에 예수의 일생을 공들여 새겨 넣고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을지도. 믿음은 반드시 성전(聖殿)의 크기에 비례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