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 마스크 500만 장 공급 첫날, 판매처 14곳 둘러보니
농협·우체국·약국 마스크 매대는 '텅'…헛걸음한 시민들
"물량 확보 안 돼" "상황 몰라 답답해" 판매처들도 '난감'
정부 비판 쏟아지자 "국민께 송구…공급에 1~2일 더 걸려"
"마스크 팔아요? 농협이랑 우체국에서 오늘부터 판다고 하던데…"
"공지문 먼저 읽어보세요. 여기는 판매 안 해요. 판매하는 건 대구나 청도, 읍·면·동 단위예요."
27일 오전 9시 40분쯤 서울 서대문구 신촌 우체국 안. 10분 동안 마스크를 찾는 시민 5명이 다녀갔다. 우체국 직원은 손에 택배나 우편물을 들고 있지 않은 손님이 들어올 때면, 묻지 않아도 먼저 "우체국 앞에 붙은 안내문을 보라"고 안내했다. 안내문을 읽은 이들은 허탈하게 집으로 돌아가거나, 애꿎은 직원들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보건당국이 품귀 현상을 빚고 있는 마스크에 대한 ‘긴급 수급 조정 조치’에 따라 이날부터 약국·우체국·농협·공영홈쇼핑 등 ‘공적 판매처’를 통해 일반 소비자가 구매할 수 있는 마스크를 하루 350만 장씩 공급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날 조선일보 디지털편집국이 공적 판매처 14곳을 둘러본 결과, 마스크 매대(賣臺)는 텅 비어 있었다.
◇꼭두새벽부터 농협·우체국·약국 찾았다가 허탕 친 시민들
이날 오전 8시 서울 영등포구 농협 하나로마트 신길점 앞. 개점 시간이 1시간 정도 남았는데도 이곳을 찾은 시민이 드문드문 보였다. 마트 앞에서 만난 시민 이병희(57)씨는 "어제 뉴스를 보고 혹시나 사람들이 몰리거나 줄을 설까 봐, 출근 시간 전에 서둘러 왔다"면서 "오면 당연히 마스크를 파는 줄 알았는데, 직원이 와서 어제 물량을 신청해서 3~4일은 더 걸린다고 안내했다. 헛걸음해서 짜증이 난다"고 했다.
이곳을 찾은 주민 김모(80)씨도 한숨을 내쉬었다. "농협에서 판다고 해서 밥도 대충 먹고 새벽부터 나왔어. 어제 높은 사람이 방송에 나와서 ‘목요일부터 팝니다’라고 하길래 믿고 나왔는데, 이러면 어떡하나. 80 평생 살면서 이 난리는 처음 보네. 인터넷도 할 줄 모르는 노인들이 여기 아니면 어떻게 마스크를 구하겠어. 다른 농협에 가면 팔고 있으려나." 그는 인근에 있는 다른 지점으로 발길을 돌렸다.
시민들의 문의가 빗발치자 직접 안내문을 입구에 써 붙인 마트도 있었다. 서울 서대문구 농협하나로마트 신촌점 입구에는 "물량 확보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언론에서 미리 보도됐고, 공급 물량 확보를 위해 현재 제조업체와 협의 중"이라며 "빠른 시일 내에 물량을 확보해 판매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내용의 종이가 붙었다. 이곳 직원에 따르면, 전날 정부의 관련 발표 뒤 마스크 구매 문의 전화만 2000건 넘게 걸려 왔다고 했다.
또 다른 공적 판매처인 우체국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 우체국을 방문한 김모(50)씨는 "지금 집에 마스크가 5장밖에 안 남았다. 어제 정부 발표만 보고 우체국에 가면 마스크를 살 수 있을 줄 알고 일찍이 지하철 타고 이곳에 왔다"면서 "판다는 건지, 안 판다는 건지… 엉뚱한 걸음 했다"고 말했다. 그는 우체국 앞을 한동안 서성거리다 집으로 돌아갔다.
서울·경기권에서는 이날 김씨처럼 헛걸음을 한 시민이 속출했다. 전국 모든 우체국이 아닌 ‘대구·청도 지역과 공급 여건이 취약한 전국 읍·면 소재 우체국’으로 판매처를 한정했다는 사실이 미처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판매처로 지정된 대구·경북 일부 우체국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대구 동구 신암2동 우체국에는 아침부터 마스크를 사기 위해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물량을 확보하지 못한 우체국이 "마스크를 판매하지 않고 있다"고 밝히면서, 시민들의 항의를 받았다. 우체국 입구에는 마스크 물량을 확보하는 3월 2일 이후, 온라인으로 판매할 예정이라는 공지만 붙어있었다.
일반 약국에서도 마스크가 판매되고 있긴 했지만, 약국 차원에서 자체적으로 확보한 물량들뿐이었다. 서울 영등포구 한 약국에서 일하는 약사 한모씨는 "오전 9시에 들어온 자체 확보 물량은 1시간 만에 진작에 다 나갔다"며 "정부 마스크는 언제 들어온다는 연락은 받은 적 없다. 그런데도 문의 전화만 5분에 한 통씩 와서 정신이 없다"고 했다. 기자가 약국에 머무는 10분 동안 남아 있던 일회용 마스크 15개가 모두 동났다.
◇"물량 확보도 안 됐는데 언론 발표부터 하면 어떡하나"…판매처는 '난감'
일선 공적 판매처 직원들은 난감하다는 입장이다. 신촌 농협하나로마트에 근무하는 한 직원은 "마스크 물량 확보가 안 됐고 언제 들어올지도 모른다"며 "물량을 확보한 상태에서 정부가 발표해야 하는데, 물건도 없는데 판매한다고 얘기하니,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난처하다. 저희도 너무 헷갈린다"고 했다.
서울의 한 우체국 관계자는 "아침에 온 가족이 찾아와서 마스크가 있냐고 물어봤다"며 "판매하지 않는다는 공지를 보고 그냥 돌아가면 그나마 운이 좋은데, 먼 곳에서 찾아온 시민이 화를 내거나 왜 없냐고 따지는 일이 발생해서 종일 난감했다"고 말했다.
약국 직원들도 마찬가지다. 약사 A씨는 "어떤 상황인지 우리도 몰라서 답답하다. 손님들은 왜 마스크를 안 파냐고 물어보는데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나도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약사 홍모(33)씨는 "약국은 의약품도매상인 ‘지오영 컨소시엄’에서 마스크 유통을 받게 돼 있는데, 하도 헷갈려서 이곳에 직접 확인해 보니 자기들도 아직 물량 확보가 되지 않았다고 답변했다"고 했다.
상황이 악화하자 대한약사회 측은 이날 "3월 초부터 판매 가능하다"는 내용의 공문을 일괄적으로 내려보냈다. 약사회 관계자는 "어제 마스크 판매 관련 보도와 물류 확보 현황이 달라 현장에서 혼선이 큰 상황"이라며 "일단은 혼선을 줄이기 위해 공문을 보냈다. 최대한 물량을 확보하고 있고,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각 약국에 매일 100장씩 물량이 공급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우정사업본부는 다음 달 2일 오후부터 마스크를 판매할 예정이라고 이날 우체국쇼핑 공지를 통해 안내했다. 우정사업본부 관계자는 "전국 3000여 개 우체국에서 모두 판매할 수는 없다"며 "어느 우체국에서 판매할지, 가격은 어떻게 해야 할지 내부적으로 논의 중이라 확정되는 대로 추후 안내할 것"이라고 말했다. 향후 추가 물량이 확보되면 온라인 판매도 창구 판매와 병행해 진행할 예정이다.
◇기재부 "세부 협의 진행 과정에서 시차 발생…공적 물량 공급 1~2일 더 걸릴 듯"
정부의 성급한 발표에 일선 현장의 혼란이 가중되자, 정부는 이날 오후 3시 뒤늦게 마스크 수급과 관련한 긴급 브리핑을 열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그동안 마스크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큰 불편과 불안감을 드린 데 대해 송구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며 "이번 조치로 확보된 공적 물량이 국민 여러분들께서 최대한 빨리, 국민 여러분께 최대한 빨리 전달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나가겠다"고 했다.
이어 정부의 계획과 공급 물량에 차질이 생긴 것과 관련, "이번 조치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기존 계약에 따른 위약금 문제 등 이슈로 인해 생산 업체와 공적 판매처 간 세부 협의가 아직도 진행 중인 곳도 있다"면서 "하루 500만 장 규모의 정상 공급체계를 구축하는 데는 하루 이틀 더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최대한 조속히 구축을 완료해 해당 물량이 공급되도록 하겠다"고 했다.
그는 "농협의 경우에는 서울·경기권을 제외한 1900개의 농협하나로마트에서, 우체국의 경우 시 단위가 아닌 유통망이 굉장히 열악한 읍·면 지역에서,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은 약국을 통해 보급하는 것이 유용하겠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공적 물량으로 확보된 마스크는 이르면 오는 28일부터 현재 평균 시중가인 3000원보다는 저렴한 수준으로 공급될 예정이라고 정부는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