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작은 도시 세이나요키에서 한 시간 정도를 달리면 인구 2만여 명이 사는 마을 쿠리카가 나온다. 지난 13일 만난 유하 예르비넨(42)은 작은 학교를 고친 집에서 아내와 다섯 아이를 기른다. 직업이 '예술가'라는 그는 화려한 나무 조각으로 장식된 북을 만든다. 부업으로 집에서 조각 체험 기회를 할 수 있는 숙박 사업도 한다.

예르비넨은 한때 실업자였다. 7년 동안 실업수당을 타서 살았다. 그런 그에게 2016년 성탄절 즈음에 정부에서 편지가 한 장 날아들었다. '기본소득 대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 당신은 이제 매달 560유로(약 73만원)를 받게 됩니다.' 예르비넨은 "아무 조건 없이 돈을 준다니,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라고 했다.

핀란드는 2017년 25~58세인 장기 실업자 2000명(전체 실업자의 1%)에게 무조건 560유로를 주는 기본소득 실험을 시작했다. 한때 핀란드 경제를 이끌던 휴대전화 회사 노키아가 무너지며 실업자가 늘고 실업수당 같은 복지 부담이 불어나던 즈음이었다. 인공지능(AI) 같은 신기술의 부상으로 인간 일자리가 사라진다는 논란이 커지던 때에 단행된 실험은 전 세계의 시선을 끌었다. 하지만 2년 후 핀란드는 기본소득 지급을 중단키로 했다. 실험이라고 애초 밝혔음을 감안하더라도 예상보다 이른 종결이었다. 그 2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교육학을 전공하고 진로 교육 스타트업 창업을 준비중인 나는 젊은이들이 진짜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고민하고 답을 찾도록 돕는 교육을 꿈꾼다. 그다지 원하지 않는데도 취업이 됐다는 이유만으로 합격한 직장에 다니는 경우를 주변에서 자주 보았다. 하지만 아무 조건 없이 '최소한의 삶'을 보장받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기본소득 덕분에 사업 도전 기회"

예르비넨에게 기본소득을 받은 2년 동안 일어난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기본소득 취지에 공감하는 쪽이었다. 예르비넨의 이야기다.

"2017년 1월부터 2년간 나는 실업수당 대신 기본소득을 받았습니다. 액수는 같았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실업수당을 받으려면 구직 활동을 하고 있음을 끝없이 증빙해야 하지만, 기본소득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또 기본소득은 제가 사업을 시작한 후(2017년 6월 이후)에도 계속 나옵니다. 기존의 실업수당이었다면 사업을 개시하자마자 돈이 바로 끊겼을 겁니다. 돈을 얼마나 버는지 상관없이 말이죠. 저는 나무에 조각을 하는 예술가이고 그 작업을 매우 좋아합니다. 전부터 이와 관련된 사업도 하고 싶었지만 괜히 일을 시작했다가 그나마 받던 실업수당까지 끊기면 어찌합니까. 그래서 그동안은 나서지 않았어요. 하지만 기본소득을 받으면서는 생각이 바뀌었어요. 최소한의 생활 안정을 위한 돈이 지속적으로 지급된다면 사업에 한번 도전해보지 않을 이유가 있겠습니까. 기본소득은 돈에만 집착하지 않고 취향에 맞는 일을 할 디딤돌 역할을 해주었어요. 적어도 저에겐 그랬어요."

핀란드 기본소득 실험 참가자인 예술가 유하 예르비넨(오른쪽)과 권수연 탐험대원.

예르비넨은 여행객들이 조각을 배우며 머물 수 있는 체험형 숙박 사업을 시작했다. '아트비앤비'라고 이름을 지었다. 기본소득으로 받은 돈으로 체험에 쓸 재료 등을 샀다. 지난여름 10팀 정도가 다녀갔다. 하루에 30유로 정도를 받았으니 그렇게 큰 소득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르비넨은 "기본소득 덕분에 엄두를 내지 못했던 내 사업을 시작했으니 만족한다"고 했다.

◇핀란드 사회보험청, "기본소득이 노동 의욕 높이지 못한다는 걸 배웠다"

그럼에도 기본소득 실험은 중단됐다. 이유는 좀 복잡했다. 우선 기본소득이 '자기 일'을 찾을 동기를 부여한다는 증거가 부족했다고 한다. 기본소득 실험을 주도한 핀란드 사회보험청(KELA) 연구진이 지난해 내놓은 중간 보고서에 따르면, 기본소득 수급자의 2017년 연간 평균 근로시간은 49.64일이었다. 기존 실업자 중 기본소득을 받지 못한 대조군(49.25일)과 거의 비슷했다. 아울러 국민 여론도 좋지 않았다. 핀란드 공영방송 YLE 설문 때 응답자의 약 60%가 기본소득 제도에 반대한다고 답했다. 세이나요키에서 만난 한 시민은 말했다. "모든 국민이 기본소득을 받는다면 좋겠지요. 그런데 그 돈은 다 어디서 나죠?"

KELA는 실험을 '실패'로 규정짓는 것은 경계했다. KELA 마르주카 튀르넨 변화관리국장은 "성공이냐 실패냐를 가리기보단 실험을 통해 기본소득이 노동 의욕을 높이진 못한다는 사실을 배웠다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핀란드엔 '실험하는 핀란드'라는 프로젝트가 있다. 튀르넨 국장은 "빠르게 변하는 세상 가운데 핀란드가 미래에 더 나은 나라가 되도록 하는 정책 실험은 기본소득 외에도 여럿이 진행되고 있는데 기본소득이 지나치게 주목받은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기본소득 같은 '당근'이 아니라 일하지 않으면 실업수당을 깎는 '채찍'형 복지라든지, 실업자 대상 통합 지원 센터 운영 등의 실험이라고 했다.

AI가 더 똑똑해지면 인간이 할 일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온다. 하지만 어찌 보면 그런 세상은 인간이 일하지 않고도 사회의 부(富)가 AI에 의해 창출되는 여유만만한 세상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상상 속 세상을 순발력 있게 실험해보는 역동성이야말로 핀란드의 힘이란 생각이 들었다. 핀란드 복지의 지향점을 묻는 내 말에 대한 튀르넨 국장의 답은 이랬다. "꾸준히 현재의 제도를 수정해가고 모델을 수정하기, 그 변화 자체가 지향점입니다. 세상은 계속 바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