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박사박/장독에도/지붕에도/대나무에도/걸어가는 내 머리 위도/잘 살았다/잘 견뎠다/사박사박".
전남 곡성 서봉마을 '길 작은 도서관'으로 들어가는 문지방 위로 윤금순 할머니가 쓴 시(詩) '눈'이 큼직하게 적혀 있다. 150여 명 사는 작은 마을이지만, 곳곳이 시로 가득하다. 집을 둘러싼 나지막한 담에는 할머니들이 쓴 시가 벽화와 함께 알록달록 새겨져 있다. 그 시와 넋두리에 할머니들 삶이 들어 있다. "그냥 저냥 살아냈어/남이 산께 나도 살았지 ―임동댁 임부남" "인자는 갈 때가 한 간(군)데밖에 없어/볼짱 다 봐 붓어/나는 다시 절머진다면 좋깻다/나는 손주들이 공부 좀 잘 했으믄 좋깼다 ―약천댁 박점례".
17년 전 목사 남편과 함께 이곳으로 이사 온 김선자(50) 관장이 마을 주민들을 위한 도서관을 열었다. 책 정리를 도우러 온 할머니들에게 "거기 거꾸로 꽂힌 책 똑바로 꽂아주세요" 하자 똑바로 꽂힌 책을 거꾸로 꽂았다. 2009년부터 할머니들에게 한글을 가르친 계기다. 김 관장은 할머니들과 동시를 읽으며 한글을 공부했다. 그러다 문득 할머니들 인생을 시로 풀어내 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할머니들에게 숙제로 내 준 시를 모아 '시집살이 詩집살이' '눈이 사뿐사뿐 오네'를 펴냈다.
시인이 된 김막동(85), 안기임(85), 윤금순(83), 박점례(73), 양양금(73) 할머니를 지난달 8일 곡성에서 만났다. 10년 전 처음 한글을 배웠을 때 기억을 묻자 감회를 쏟아냈다. "아유! 배울랑께 하나에서 열부터 다 어렵제"(박점례), "기냥 억지로 했어요. 갈쳐 줘도 자꾸 까먹어. 근데 재밌어"(김막동), "시방 10년 전만 해도 쏙쏙 잘 들어왔어. 인자는 글자가 어디 가뿔고 그래"(양양금).
한글을 모른 채 60년 넘게 살아온 건 '여자'였기 때문이다. "전에는 부모들이 지금 맹키로 막 여자애들을 가르치려고 하질 않아. 안 가면 그냥 그걸로 끝나. 그때 어른들은 징그럽게도 독 안에 가둬놓고 딸애들을 키우려고 했어." 양양금 할머니는 그 설움을 시로 옮겼다. "동생들 키우느라 학교를 못 갔다/친구들이 글자도 모르는 것이 까분다고/기가 팍 죽었다".
한글을 배우며 시에 눈뜬 할머니들은 시도 때도 없이 시를 썼다. 일하다가, 자다가 시상(詩想)이 떠오르면 해 지난 달력 뒷면, 전단 등에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떠오르는 단어를 받아 적었다. 허청(곳간), 때왈(꽈리), 몬당(고개) 같은 전라도 방언을 듬뿍 담았다. "시가 뭐인지도 모르는 사람들헌티 시를 쓰라고 하는디 뭔 생각이 나겄소. 긍께 처음엔 아주 속이 타버릴려고 하는디… 한 말 한 말씩 한 것이 시가 됐어"(박점례), "방바닥에 손가락으로 한번 적어보고, 그담에 연필로 한번 쓱쓱 썼지"(양양금). 김 관장은 "할머니들이 유독 달력에 시를 써오는 걸 좋아하신다"며 웃었다. "종이도 아깝고, 집에 해 지난 달력 쌓아둔 게 많아. 빳빳해서 쓰기 좋아."(박점례)
처음 한글을 배울 땐 가족에게 숨겼다. 윤금순 할머니는 "아이고, 나이 먹고 이제야 배우니까 추접스럽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어" 했다. 박점례 할머니는 "책가방도 생전 보이는 데 안 두고 감춰놨다"며 웃었다. "(자식들이 내가) 이름자도 모르고 그런 줄 알면…." 그러나 시집을 두 권이나 낸 할머니들은 이제 한글 배운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자식들이) 연필도 사주고 공책도 사줘, 호호!"
할머니들은 아직도 배우고 싶은 게 많다. 양양금 할머니는 "어려운 받침이랑 산수 쪼께 더 배우면 살겠다"고 했고, 박점례 할머니는 "공부란 게 끝이 없다"고 했다. "한글 덕에 내 이름자도 써보고, 세상 구경 잘하면서 재미나게 살지요."(김막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