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디자인 전시는 보통 폰트(인쇄용 서체) 자체나 폰트가 들어간 그래픽에 집중합니다. 레터링(문자 도안)만으로 하는 전시는 거의 없었는데 이번에 그 가능성을 봤네요."
"축하 카드를 직접 그려오신 미대생도 있었고, 온 가족을 데려온 고등학생도 있었죠. 한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걸 실감했습니다."
최근 서울 합정동 카페에 모인 '슭곰발' 멤버들이 지난 연말에 열린 첫 전시회를 돌아보며 말했다. 한글 디자인 끝말잇기 모임인 슭곰발 멤버는 서체 디자이너 이가희(35), 이수연(34), 이승협(33), 이주현(32), 정태영(29). 앞 사람이 그린 단어를 다음 사람이 24시간 안에 이어받아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방식으로 지난해 123점의 레터링을 완성해 연말 전시회까지 열었다. 다음 달 4~23일 전시는 울산으로 간다. 또 올해는 멤버를 7명으로 늘리고 레터링 워크숍도 열기로 했다.
끝말잇기를 시작한 건 지난해 5월쯤이었다. 직장에서 퇴사한 이주현과 먼저 독립한 이가희가 "이제부터 뭘 할지" 의논하다 나온 아이디어였다. "기왕이면 재밌는 걸 해보고 싶었고, 둘보다는 여럿이 모여야 다양한 작품이 나올 것 같았어요." 5월 정태영, 7월 이승협, 8월 이수연이 합류했다. 각자 '생업'이 있지만 재밌는 일이었기에 끝까지 할 수 있었다. "슭곰발은 조형 실험을 많이 시도할 수 있는 기회여서 즐거웠어요. 재미와 마감이 있으면 어떻게든 마무리되는 것 같아요."(이주현)
처음엔 매월 주제 색상을 지정하다가 '육개장'을 초록색으로 디자인해야만 했던 안타까움에 제한을 없앴다. 평소 흰 바탕에 검은 글씨만 들여다보던 서체 디자이너들은 개성을 마음껏 드러냈다. 이승협은 "고딕, 돋움 같은 서체만 바라보느라 다양한 조형을 다루지 못하는 게 아닌가 불안했는데 이번에 원 없이 시도해볼 수 있었다"고 했다.
슭곰발은 최근 한글 디자인 분야에서 두드러지는 두 흐름의 교차 지점에 위치한다. 우선 한글에 대한 젊은 디자이너들의 관심이 크게 높아졌다. 2010년대 이후 복고풍 디자인이 유행하고, 예스러운 느낌의 한글 디자인 작품이 등장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이수연은 "한복이 예전에는 그저 전통 의상이었는데 지금은 누구나 경복궁에서 한복 입고 사진 찍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소셜미디어가 젊은 디자이너들의 작업을 선보이는 통로로 떠올랐다는 점도 최근의 경향. 이가희는 "슭곰발을 처음 구상할 때도 소셜미디어에 개인 작업을 틈틈이 소개하는 다른 디자이너들의 활동이 자극제가 됐다"고 했다.
놀이처럼 작업을 하면서도 한글을 대하는 자세는 진지하다. 정태영은 "얼마 전 바우하우스 전시를 봤는데, 최소한의 효율적 모듈로 최대한 많은 사람의 삶을 개선하는 게 바우하우스의 철학이었다고 하더라"면서 "세종대왕도 많은 사람이 효율적인 문자를 쓰도록 한글을 만들었으니 바우하우스보다 500년 앞섰던 셈"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