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처럼 될라, 유학생도 대만으로 투표 귀향

입력 2020.01.13 03:00

[대만 총통 선거 현장]

차이잉원 총통, 역대 최다표 재선… 홍콩시위가 反中여론에 불질러
홍콩시위 뒤 지지율 급등, 대만총통 재선 공신은 시진핑

817만표, 국민 57% 지지 받아 "오늘의 홍콩이 내일의 대만"
反中전략으로 젊은층 지지 유도… 국회 의석 과반 유지도 성공
차이잉원 "中 위협에 굴복안해", 中 "일국양제 방침 변함없다"

박수찬 특파원
타이베이=박수찬 특파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유학 중인 천자헝씨는 지난주 대만 타이베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12시간 비행기를 탄 이유는 총통 선거 때문이었다. "작년 9월쯤 홍콩 시위 뉴스를 보다가 친구 둘과 함께 비행기표를 끊었어요. 이번 선거에선 베이징의 억압에 맞서 대만 주권과 독립을 지킬 사람을 뽑아야겠다고요."

11일 밤 타이베이 민주진보당(민진당) 당사 주변 도로는 천씨를 포함해 시민 수만명으로 가득 찼다. 민진당 후보인 차이잉원(蔡英文·63) 총통 지지자들이다. 20~30대와 여성이 많았다. 손에는 민진당 선거 구호 '2020 대만 승리하자'가 쓰인 깃발을 들었다.

"800! 800! 800!" 개표 방송이 중계되는 대형 스크린에서 차이잉원의 득표 수가 800만표를 넘어서자 지지자들은 환호했다. 지금까지 대선 최다 득표(득표수 기준)는 2008년 국민당 마잉주(馬英九) 전 총통이 얻은 765만표였다.

이날 치러진 대만 총통 선거에서 차이잉원 현 총통이 817만표(57.1%)를 얻어 재선에 성공했다. 국민당 한궈위(韓國瑜) 후보는 552만표(38.6%)를 얻었다. 민진당은 같은 날 치러진 총선에서도 국회 의석(113석) 가운데 61석을 차지해 국민당(38석)을 제치고 국회 과반을 유지했다.

차이잉원 대만 총통 지지자들이 11일 대만 타이베이 민주진보당 당사 주변에 모여 이날 실시된 대만 총통 선거에서 차이잉원 총통이 승리한 것에 대해 휴대폰 불빛을 비추며 환호하고 있다. 차이잉원은 선거에서 817만표(57.1%)를 얻어 552만표(38.6%)를 얻은 국민당 한궈위 후보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차이잉원 대만 총통 지지자들이 11일 대만 타이베이 민주진보당 당사 주변에 모여 이날 실시된 대만 총통 선거에서 차이잉원 총통이 승리한 것에 대해 휴대폰 불빛을 비추며 환호하고 있다. 차이잉원은 선거에서 817만표(57.1%)를 얻어 552만표(38.6%)를 얻은 국민당 한궈위 후보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AP 연합뉴스

차이잉원 총통은 당선 확정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대만은 중국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오늘 선거 결과는 대만인들이 (중국의)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 두 체제)를 거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했다. 작년 1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대만을 향해 "평화통일, 일국양제가 가장 좋은 통일 방식"이라고 했다. 미국·영국·일본은 차이잉원 재선을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중국 국무원 대만판공실은 당선 확정 직후 "(대만에 대한) 평화 통일, 일국양제의 기본 방침을 지킬 것"이라며 "어떠한 형식의 대만 독립과 분열 시도에 대해 결연히 반대한다"고 했다.

작년 6월까지도 차이잉원 총통은 재선이 불확실했다. 2018년 11월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민진당은 22개 시·현(縣) 가운데 15개를 국민당에 내주며 참패했다. 차이잉원은 민진당 주석직에서 물러났다. 민진당이 내세운 탈(脫)원전 정책, 연금·노동 개혁 정책이 경제계와 공무원·교사·군인·근로자 등의 반발을 샀다.

11일 대만 총통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한 차이잉원 대만 총통이 당선이 확정된 뒤 타이베이 선거운동본부에서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11일 대만 총통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한 차이잉원 대만 총통이 당선이 확정된 뒤 타이베이 선거운동본부에서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EPA 연합뉴스
하지만 지난해 1월 2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홍콩·마카오에 적용해온 일국양제 방식으로 대만을 통일하겠다고 연설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대만 내에 '망국감'(亡國感·나라가 망할 수 있다는 우려)이라는 단어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해 6월 범죄인 인도법 반대로 시작된 홍콩 시위는 대만 내 반중(反中) 여론에 불을 질렀다. 일국양제 아래 있는 홍콩 시민 수십만명이 법안 철회, 행정장관 직선제 등 정치적 자유를 요구했지만 중국 정부는 오히려 홍콩에 대해 공산당 통제를 강화하겠다고 나섰다.

민진당은 "홍콩의 현재가 대만의 미래"라며 홍콩 사태를 부각했다. 전문가들은 이 말 한마디가 이번 선거의 결정타였다고 말한다. 친중(親中) 진영인 국민당을 제치고 차이잉원과 민진당이 승리한 것은 '샤프(sharp) 파워'라고 불리는 중국의 강경 전략에 대한 반작용 때문이라는 것이다. 샤프 파워는 군사 개입을 뜻하는 '하드 파워'나 문화적 영향력을 뜻하는 '소프트 파워'와 달리 회유와 협박 등을 통해 외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민진당, 홍콩시위 사진 띄우고 유세… 국민당 한궈위 패배 인정 - 쑤전창(왼쪽 사진 오른쪽에서 여섯째) 대만 행정원장이 10일 수도 타이베이에서 열린 총통 선거 집회에서 홍콩 시위 사진을 배경으로 차이잉원 현 총통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차이 총통은 11일 총통 선거에서 국민당 후보 한궈위 가오슝 시장을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오른쪽 사진은 한궈위(왼쪽) 후보가 11일 가오슝시에서 선거 패배 승복 발언을 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 /AP 로이터 연합뉴스
민진당, 홍콩시위 사진 띄우고 유세… 국민당 한궈위 패배 인정 - 쑤전창(왼쪽 사진 오른쪽에서 여섯째) 대만 행정원장이 10일 수도 타이베이에서 열린 총통 선거 집회에서 홍콩 시위 사진을 배경으로 차이잉원 현 총통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차이 총통은 11일 총통 선거에서 국민당 후보 한궈위 가오슝 시장을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오른쪽 사진은 한궈위(왼쪽) 후보가 11일 가오슝시에서 선거 패배 승복 발언을 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 /AP 로이터 연합뉴스
중국은 대만인의 중국 내 투자 제한을 풀어주는 등 회유 정책을 펴면서 동시에 대만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여왔다. 대만 언론에 따르면 중국은 지난해 중국인의 대만 개인 관광을 금지했고, 대만의 수교국이던 솔로몬제도·키리바시와 수교하며 대만을 국제적으로 고립시켰다. 2016년 차이잉원이 집권할 당시 22개였던 대만의 수교국은 현재 15개다. 대학생인 천이쥐씨는 "중국과 잘 지내야 경제가 좋아진다고 하지만 그 전제로 민주나 자유 같은 가치를 양보하라는 것은 배부르게 먹되 숨을 쉬지 말라는 소리"라고 했다.

중국의 압력이 커진다고 느낀 젊은 유권자들이 적극 투표에 나선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 대만은 본적지에서 투표를 하는데 외지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투표하러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장거리 버스와 고속철이 매진됐다. 이번 대선 투표율은 74.9%로 2016년(66.27%)보다 크게 올랐다. 대만 언론은 "'말린 망고'(망국감과 중국어 발음이 비슷해 망국감의 의미로 쓰임)가 '한류'(한궈위 열풍)를 이겼다"고 했다.

대만 대선 지지율 변확 그래프

'하나의 중국' 원칙을 인정하지 않는 차이잉원 총통 재선으로 양안 관계는 냉각될 전망이다. 차이잉원은 대만 독립을 주장했던 천수이볜 전 총통과 달리 양안 관계에서 '현상 유지'를 강조하면서 미국·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주력해왔다. 국민대 이광수 교수는 "미국 역시 차이잉원 정권이 양안 관계를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지지하고 있다"며 "차이잉원은 미국으로부터 무기 수입을 늘리는 등 트럼프 정부의 외교적 지지를 얻는 데 주력할 것"이라고 했다.

중국 관영매체들은 이날 차이잉원 총통 재선에 대해 "속임수"라며 비난과 협박을 쏟아냈다. 관영 신화통신은 "차이잉원과 민진당에 경고한다. 제멋대로 행동하지 말라"고 했다. 관영 환구시보도 "대륙의 힘은 갈수록 강해져 막을 수 없고, 대만과 차이는 커지는 반면 대만 해협에서 미국의 역할은 장기적으로 약해질 수밖에 없다"며 "(독립을 꾀하는) 역사의 죄인이 되지 말라"고 했다. 중국 외교부는 이날 차이잉원 총통 재선에 축하 입장을 밝힌 미국 등에 대해 "하나의 중국 원칙을 어긴 것"이라며 "엄중히 항의했다"고 밝혔다.

중국이 이번 선거 이후 대만과 대화에 나설 가능성은 낮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오히려 중국이 대만 수교국을 압박해 단교를 유도하고 대만 해협 주변에서 군사 행동에 나서는 등 압박을 가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신화통신은 이날 "대만 독립을 억제하거나 대만 동포를 돕기 위한 정책도구들을 충분히 비축하고 있다"고 했다. 자오춘산 대만 담강대 대륙연구소 명예교수는 "시진핑이 헌법 개정으로 3번째 연임에 나서는 2022년이 다가올수록 양안 관계는 시진핑의 포석에 영향을 주게 되기 때문에 중국이 (대만 문제에서) 현상 유지를 이어가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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