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민 산업2부 기자

지난 7~10일(현지 시각)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IT 전시회 'CES 2020'에서는 예년에 비해 한국말이 유난히 많이 들렸다. 올해 CES에 참가한 한국 기업은 역대 최다인 390개. 전년보다 10% 이상 늘었다. 미국(1933곳), 중국(1368곳)에 이은 3위다. 이번 전시회를 찾은 한국인은 1만여명이었다.

한국 기업은 필사적이었다. 소니·파나소닉 등 일본 업체와 TCL·하이센스 등 중국 업체 부스를 드나들 땐 적(敵)의 제품과 서비스를 샅샅이 '해부'하는 한국인 2~3명과 꼭 마주쳤다. 기업 CEO들은 마라톤 하듯 비즈니스 미팅을 갖느라 입에 침이 말랐다. 한 대기업 홍보팀은 전시장 모습을 동영상으로 촬영해 실시간으로 한국에 보냈다. "글로벌 흐름을 1분이라도 빨리 전 직원과 공유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사비를 털어 온 증권사 애널리스트, 교수도 많았다.

올해와 내년은 세계 테크 트렌드 흐름상 중요한 시기다. 지난 2년간 글로벌 IT 업계에서는 AI(인공지능), 5G(5세대 이동통신), 자율주행 등 미래 기술에 대한 정의가 내려졌고 비전이 제시됐다. 이젠 구체화하는 단계다. 인공지능 플랫폼(기반기술) 등을 개발한 테크 기업들은 스마트폰·TV 등 IT 기기를 제조하는 데 세계 최고인 삼성·LG와 손잡고 본격적인 상품화에 나서고 싶어 한다. 한국 기업들은 이를 기회로 미국과 중국이 장악한 미래 테크 시장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려 한다.

필사적인 건 각국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정부의 기술 정책을 담당하는 백악관 CTO(최고기술책임자)는 폐막까지 나흘간 줄곧 자리를 지켰다. "모든 첨단 기술을 다 보고 오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특명 때문이었다. 구글·애플·페이스북·아마존이 세계 시장을 쥐고 흔드는 미국이지만 경계를 늦출 수 없다는 치열함이 느껴졌다.

반면 우리 정부는 한가했다. 첨단 기술과 스타트업들을 총괄하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은 전시회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참석한 고위 정부 인사는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유일했다. 우버와 협력 논의 시간 등을 빼면 그도 전시장을 본 것은 하루에 불과했다. CES 전시장은 축구장 33개 규모다. 하루로는 수박 겉핥기도 힘든 시간이다. 현장에서 만난 한 IT 업체 대표는 "최저 실업률 기록이 계속 경신되는 초호황기의 미국 정부도 미래 테크 경쟁에서 실수할까 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며 "트럼프가 대통령인 나라가 처음으로 부러웠다"고 말했다.

우리 지도자, 고위 관료도 발품 팔며 글로벌 흐름을 몸으로 느껴야 한다. 그래야 세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떻게 해야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지 감을 잡을 수 있다. 대(對)이란 전쟁이 터질지 모를 일촉즉발 상황에 있던 미국 대통령이 신경 쓸 일이 없어서 CTO를 CES에 보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