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바닷물이 깊다 말하지만/ 내 그리움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리/ 바닷물은 끝이라도 있을진대/ 나의 그리움은 까마득히 끝도 없구나….'

중고서점에서 집어 온 시집을 무심코 뒤적이던 작곡가 유민희(40)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에 잠시 숨을 멈춰야 했다. 당나라 여성 시인 이야(李冶)가 애끓는 사랑을 외로운 달빛에 빗댄 시 '상사원(相思怨)'이 눈에 밟혔다. 느린 6박의 장단이 떠오른 그는 음색 맑은 양금과 호소력 짙은 대금 선율에 시를 노랫말로 얹어 같은 제목의 정가를 지었다. 25현 가야금과 첼로로 서정과 깊이를 더했다.

7일 서울돈화문국악당에서 작곡 발표회 '프리저브(Preserve): 지키다, 보존하다'를 열고 '상사원'을 포함해 성악 작품 여섯 개를 선보인 그는 "아프다고 '아파!'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보다 질감으로 은은히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 더 좋다"고 했다. 그는 주로 삶의 이야기, 그림이나 문학에서 영감을 얻어 빈 노트에 전통 국악 선율을 그린다.

지난 6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유민희는 “어릴 적 부모님과 산에 올랐던 기억에서 거문고 독주곡 ‘산행’을, 당나라 시인 왕유의 시 ‘청계(淸溪)’에서 대금 독주곡 ‘푸른 시내’를 떠올렸다”고 했다.

국립국악고등학교를 나와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에서 학·석사 과정을 마친 그는 스물여섯이던 2006년부터 꾸준히 창작 음악 결실을 내놓았다. 또래의 다른 작곡가들이 국악과 블루스, 재즈, 록을 섞은 퓨전 음악에 심취하거나 서양 악기를 섞어서 관객들이 듣기 편한 선율을 만들어내는 데 비해 그는 처음부터 전통 성악, 특히 정가에 집중해 시김새나 창법을 탐구해왔다. 국악 하면 떠오르는 흥(興)과는 거리가 멀어서 상업성이 없는 듯한데 어법은 또 세련돼서 대중의 사랑을 받는다.

대학 졸업 무렵 퓨전음악 붐에 솔깃했지만 '50대 때 어떤 사람으로 불리고 싶은지 생각하라'는 스승의 말이 죽비처럼 다가와 '정통'을 고수했다. "국악을 잘 살리는 게 저한텐 무기인 거죠. 게임하는 아이들이 요즘 쓰는 말로 '아이템'! 저라는 캐릭터에 그걸 장착하면 힘센 '마스터'가 돼서 뭘 하든 이길 수 있잖아요."

스물셋에 결혼해 아들 낳고 살림하느라 바깥 유혹에 덜 흔들릴 수 있었던 것도 다행이었다. "선비들이 즐기던 노래인 정가는 화가 나도 절제하고 기뻐도 촐싹대지 않아요. 그러니 재미가 없죠." 하지만 정가의 매력은 일자다음(一字多音). "'사랑'이란 한 글자를 '사아아라아앙'처럼 풀어서 길게 부르기 때문에 귀 기울여 곱씹는 맛이 있어요. 끝맺을 때에도 서양 음악처럼 '도'나 '라' 음에서 일괄적으로 마치지 않고 가다가 뚝 떨어지거나 음이 요동을 쳐요."

지난 연말 독일 베를린의 콘체르트하우스에서 그는 생황과 피리, 해금을 써서 '프리다 칼로를 위한 발라드'를 선보였다. 관객들은 '솔이 있다' '한국적'이라며 좋아했다. "르누아르와 뭉크 화풍이 다른 것처럼 작곡가에게도 작풍이 있죠. 서양인들이 전통 국악에 환호하는 건 낯설어서 신선하기 때문이에요." 작곡이 그에게 뭐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힘들어서 종종 때려치우고 싶다가도, 요행을 바랄 수 없어 뿌듯한 작업이기도 해요. 부산에서 서울로 오려면 고속도로 416㎞를 1㎝도 건너뛰지 않고 온전히 밟아야 다다를 수 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