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카스=김정훈 기자

5일 오후(현지 시각) 베네수엘라 국회의장인 후안 과이도(36)는 뾰족한 국회 철문을 타고 넘어 국회 진입을 시도했다. 하지만 폭동 진압용 방패에 가로막혀 의사당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이날 과이도는 임기 1년의 베네수엘라 국회의장 선거에서 재신임받기로 예정돼 있었다. 그러나 니콜라스 마두로 정부가 동원한 경찰들이 과이도 의장의 국회 진입을 원천 봉쇄했다. 이 시각 마두로 대통령은 항구 도시 라과이라의 새 야구장 개관식에 참석해 '축제' 분위기를 연출했다.

앞서 의사당 안에선 친여(親與) 의원들이 모여 루이스 파라를 새 국회의장으로 선출했다. 자신을 '임시 대통령'이라고 선언하며 마두로 대통령 축출의 구심점이 돼 온 야권 지도자 과이도의 의장 재선을 막기 위해서였다. 현지 언론들은 이 투표가 정족수를 채우지 못했고, 거수로 진행됐으며, 찬성 투표수조차 세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파라 의원은 지난달까지 야당 소속이었지만 최근 뇌물 수수 혐의로 당에서 제명된 인물이다.

과이도와 야권 의원들은 강력 반발했다. 인근에 있는 야권 성향 일간지 엘나시오날 본사에서 회의를 열어 과이도를 국회의장으로 재선임했다. 167명 의원 정원 중 100여명이 찬성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 나라에 국회의장이 두 명 있는 기이한 상황이 시작된 것이다. 한 베네수엘라 방송기자는 "우리나라에선 상상할 수 없는 모든 일이 일어난다"고 했다.

베네수엘라에선 실제 그런 일이 많았다. 2018년 말 베네수엘라의 확인 석유 매장량은 세계 전체의 17.5%로 세계 1위지만, 생산량은 전체의 1.6%에 그친다. 마두로의 전임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석유 국유화를 본격화하며 외국 기업과 전문 인력을 내쫓고 대거 자기편을 심는 과정에서 석유 산업 경쟁력이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배럴당 100달러일 시절 만든 보조금과 복지 퍼주기 정책으로 정권은 대중의 표(票)를 샀지만, 유가가 떨어지자 대중의 생활은 나락으로 곤두박질쳤다. 20년간의 포퓰리즘(대중 영합주의)의 반작용으로 지난해 '한 나라, 두 대통령'이라는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했다.

미국 등 서방이 베네수엘라 대통령으로 인정한 후안 과이도 베네수엘라 국회의장이 5일 신임 의장 선거가 열리는 의사당으로 들어가기 위해 철문을 넘으려 하고 있다(왼쪽 사진). 의사당 진입에 실패한 야권은 인근 신문사에 들어가 자기들끼리 회의를 열고 과이도를 의장으로 재선임했다. 같은 시각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과 부인 실리아 플로레스 여사가 항구 도시 라과이라의 야구장 개관식을 찾아 군중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오른쪽).

과이도가 중심이 된 의회를 와해하려는 마두로의 노력은 그간 끊이지 않았다. 그의 재선을 막기 위해 마두로 측은 일부 야당 의원들에게 최대 50만달러(약 5억8000만원)의 거액을 제안하기도 했다고 뉴욕타임스는 최근 보도했다. 베네수엘라 월 최저임금 35만볼리바르를 현재 달러 시세로 환산하면 5달러 정도이니, 50만달러는 베네수엘라에서 어마어마한 돈이다. 마두로 정부는 지난해부터 강성 야권 인사 30여명을 구금하거나 체포한 것으로 집계됐다.

과이도는 현재도 야권의 중심이긴 하지만 지난 1년간 몇 차례 실기(失機)해 대중적 인기가 예전만 못하다. 지난해 2월 미국 등이 보내 인접국 콜롬비아에 쌓아둔 구호물자를 베네수엘라 안으로 반입하지 못했고, 4월엔 설익은 쿠데타 계획이 마두로에게 사전 발각돼 실패했기 때문이다. 과이도의 후원자였던 존 볼턴 전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해임도 과이도의 힘을 위축시켰다. 과이도를 중심으로 마두로 정권을 교체하려던 미국의 시도도 일단은 벽에 부딪혀 있는 상태다.

미국은 이날 마두로 정권의 '불법' 행위를 강력히 비난했다. 마이크 코잭 미 국무부 차관보는 "베네수엘라 헌법에 따라 과이도는 여전히 베네수엘라의 임시 대통령"이라고 밝혔다. 유럽연합 역시 과이도를 임시 대통령으로 계속 인정하겠다고 했다.

이날 늦게 마두로는 TV 연설을 통해 올해 국회의원 선거를 시행하겠다며 "우리는 국회를 투표로 재건하길 열망하며, 꼭 이뤄낼 것이다"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20여 정당으로 쪼개져 지리멸렬한 야권을 완전히 접수하기 위해 마두로가 올 연말로 예정돼 있는 국회의원 선거를 대폭 앞당겨 치를 것이란 전망도 내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