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난(欄)은 조선 글을 바르게 쓰는 난이다. 우리가 이제까지 쓰는 조선 글은 철음식(綴音式)이었다. '사람이 말을 한다' 할 것을 '사라미 마를 한다' 같이 쓴 것이다. 좀 부끄러운 말이지만 우리가 말이 있으되 말을 말답게 하지 못하고 글이 있으되 글을 글같이 쓰지 못했다."

1927년 신년 정초 조선일보 지면에 '한글난'이 신설됐다. 당시까지 소리 나는 대로 적던 관습에서 벗어나 표준과 문법에 맞도록 쓰자는 '한글 바로 세우기' 운동이었다. 닷새 후인 1월 6일자 시평(時評)을 통해서는 한글난 신설의 취지를 명확하게 밝혔다. "생장해가는 '내 마음'을 아름다운 '내 글'로 쓰고 읽고 또 전해 주기를 힘쓰는 것을 새해부터 전민중적 사업의 한 중요한 과목으로 삼아서 적더라도 이 운동 상의 기념할 만한 시기를 만들고자 함"이었다. 2년 뒤인 1929년에는 문맹 타파를 위한 문자보급운동에 대대적으로 나섰다.

장지영이 1930년 조선일보 문자보급운동 교재로 제작한 ‘한글 원본’. 모두 16쪽으로 자모음과 간단한 문장을 소개하고 ‘흥부전’의 한 대목을 실었다.

조선일보의 문자보급운동은 독립운동가이자 국어학자인 주시경(1876~1914) 선생이 1911년 시작한 최초의 국어사전인 '말모이' 편찬 작업에 뿌리를 두고 있다. 주시경은 우리 말과 글을 잊으면 민족의 정신과 문화도 빼앗긴다는 뜻에서 제자들과 '말모이' 편찬에 착수했지만 빛을 보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1921년 창립한 조선어연구회는 장지영·최현배·이극로·이병기 등이 중심이 돼 조선어사전 편찬 사업에 착수했다. 1931년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바꾸고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한 뒤 의욕적으로 사전 편찬에 나섰지만,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중단된다.

일제강점기 우리 말과 글을 지키는 일에 앞장섰던 건 조선·동아일보 같은 민족지들이었다. 주시경의 제자로 조선어연구회의 창설 회원이었던 장지영(1889~1976) 선생은 1928년 조선일보 편집인에 취임한 직후 '문자보급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1929년 신년호에 '새해에는 우리말과 글에 힘을 들이자'는 글을 실었다. 이 글에서 "사람의 슬픔은 말 못하는 데서 더 큼이 없고 글 못 보는 것보다 더 큼이 없다"며 "먼저 우리말과 글을 찾고, 우리말과 글은 우리 것으로 세우자"고 호소했다. 1930년엔 55회에 걸쳐 '한글 철자법 강좌'를 연재하고, 문자보급운동 교재인 '한글 원본'도 제작했다. 문자보급운동은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가는 남녀 학생들이 농촌 문맹자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운동으로 일제강점기 최대의 민중 계몽운동으로 평가된다. 그는 훗날 "이 일을 맡은 3년 동안 전국에 안 간 곳이 없이 다니게 되었으며 글을 깨쳐 신문을 읽게 된 사람이 30만 명이 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고 회고했다.

1930년대 말에 이르자 일제는 일상생활에서도 한글 사용을 금지했다. 하지만 조선일보는 독자적으로 한글 철자법 통일에 나섰다. 1939년 5월 '철자법 통일위원회'라는 기구를 만들고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연구했다. 이 연구회에 주시경의 아들인 주왕산과 소설가 홍명희의 장남 홍기문, 방종현 등 당대의 국어학자들이 위촉됐다. 최현배의 아들인 최영해는 조선일보 교정부 기자로 우리말글 지키기에 합류했다. 조선일보의 철자법 통일은 조선어학회의 연구 결과를 현실에 적용한 것이며, 조선총독부의 '조선어 사용 금지' 규정에 정면 대립하는 것이었다.

창간 100주년을 맞은 조선일보가 문체부·국립국어원·한글학회와 함께 펼치는 '말모이 100년, 다시 쓰는 우리말 사전' 운동은 일제강점기에도 우리 말과 글을 목숨 걸고 지켰던 선현들의 얼을 되살리는 작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