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세군 자선냄비 자원봉사 일일 체험해 보니
아이·가족부터 외국인·군인까지 "기부할 수 있어 행복"
자원봉사 참여한 쪽방民 "사회로부터 받은 도움 나누고파"
"'이영학 사건'으로 모금 갈수록 줄어...자선냄비 80%로 줄여"
2019년 마지막 금요일이던 지난 27일 오후 서울역 2번 출구. 분주히 움직이는 인파 사이로 청명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빨간색 구세군 자선냄비 옆에서 자원봉사자 ‘케틀메이트’들이 울리는 종소리였다.
기자는 이날 ‘1일 케틀메이트'가 돼 자선냄비 옆을 지켰다. 케틀메이트의 상징인 빨간색 롱패딩 점퍼를 입고 지퍼를 턱 아래까지 단정하게 채웠다. 2시간 동안 3~5초 간격으로 자선냄비 ‘트레이드 마크'인 종소리를 쉼없이 울렸다. 같은 시각 서울뿐 아니라 부산, 대구 등 전국 도심 350여 곳에서도 같은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2시간 동안 약 20명 모금 참여… 외국인 관광객부터 군인까지 따스한 손길
서울역을 지나는 많은 인파에도 자선냄비에 다가오는 시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기자가 서 있던 두 시간동안 지갑을 연 이는 20명 남짓. 기자가 적극적으로 모금 활동에 나서보고자 지나가는 시민에게 인사도 건네봤지만, 무심하게 지나치기 일쑤였다. 오히려 구세군 현장 담당자는 "과도한 모금 유도 행위는 시민들이 부담을 느낄 수 있다"며 "가만히 종을 울리며 감사 인사를 하는 게 낫다"고 귀띔했다.
그럼에도 고마운 손길이 있었다. 역을 향해 가다 발길을 돌려 성금을 낸 할머니, 쓰다 남은 한국 돈을 자선냄비에 넣은 외국인 관광객 등이었다. 이날 군복을 입고 부대로 복귀하는 길에 1만 원을 기부한 권기원(26)씨는 "우리나라에서도 기부가 성행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성금함이 보이는 대로 돈을 넣는다"고 말했다.
이날 성금에 참여한 시민들은 하나같이 "기부할 수 있어서 기쁘다"라고 입을 모았다. 다섯살 딸의 손을 잡고 자선냄비에 돈을 넣은 신현나(35)씨는 "매년 첫 번째로 보이는 자선냄비에 성금을 하는데, 내 마음이 따뜻해지기 때문"이라며 "특히 오늘은 처음으로 딸과 함께 성금하는 날이라 더 뜻깊다"고 했다. 두 손을 꼭 잡고 만 원짜리 몇 장을 냄비에 넣었던 배윤임(73)·박승일(78) 부부 역시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받은 게 많다"며 "많은 사람이 자신이 가진 것을 서로 나누면서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왜 여유있을 땐 돕지 못했을까"… 자원 봉사 나선 쪽방촌 주민들
이날 기자와 함께 자선냄비를 지킨 '케틀메이트'는 조금 특별했다. 정부와 구세군으로부터 지원을 받아온 쪽방촌 주민 배모(50)씨와 장모(63)씨였다. 이들은 쪽방촌 이웃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에 직접 모금활동에 나섰다고 했다. "캐틀메이트 활동을 하면서 낯선 사람에게 인사하는 방법도 배우고, 아이들한테 웃음도 배웠어요. 힘이 다할 때까지 매년 구세군 종을 울릴 겁니다." 장씨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최근 5개월 간의 항암 치료를 마친 배씨는 "건강이 허락할 때 최대한 남들을 도우며 살고 싶다"며 "한 번 투병 생활을 해보고 나니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몸이 아프면 하고 싶어도 못한다"고 말했다. 장씨도 "여유로울 땐 봉사활동을 할 생각도 못했다. 그런데 사업이 화재 때문에 망하고 쪽방상담소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보니, ‘왜 여유로울 때 남들을 돕지 못했을까’하는 후회가 들었다"고 말했다.
하루동안 케틀메이트가 되기 위해서는 1365 자원봉사포털에서 ‘구세군 자선냄비’를 검색한 다음 시간과 장소에 맞는 활동을 신청하면 된다. 특별한 자격 조건은 없다.
◇갈수록 줄어든 기부금...자선냄비도 443개→353개
하지만 도움의 손길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구세군에 따르면 지난 21일 기준 구세군의 자선냄비 거리 모금액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3% 줄었다. 구세군 관계자는 "특히 '어금니 아빠'로 기부금을 받아온 2017년 이영학 사건 발생 이후 모금액이 크게 줄었다"고 했다.
희귀병 치료를 위해 잇몸을 모두 긁어내 어금니만 남아 '어금니 아빠'로 알려진 이영학(35)씨가 딸의 수술비로 기부받은 돈으로 외제차를 타는 등 호화생활을 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논란이 됐다. 이씨는 10여 년 전부터 방송 등을 통해 어금니아빠로 알려진 이후 사정을 안타깝게 여긴 시민들로부터 많은 기부금을 받아왔다.
어금니 아빠 사건으로 지난해부터 기부금이 줄기 시작했다. 행인들이 지난해 11~12월 두 달간 자선냄비에 넣은 성금은 31억원, 기업이 후원한 돈이 24억원으로 모금액은 총 55억원이었다. 2017년 모금액 62억원(자선냄비 36억원, 기업후원 26억원)보다 11%(7억원) 줄어들었다. 하루 평균 구세군 냄비 한 곳에 모금된 액수는 2017년 14만 4300원이었는데, 작년에는 11만 5500원 꼴이었다.
성금은 ‘현금’이라는 인식도 기부액이 줄어든 영향을 미쳤다. 구세군은 현금을 들고 다니지 않는 시민을 위해 후불 교통카드, 네이버페이, 제로페이 등으로 1000원씩 성금할 수 있도록 한 ‘스마트자선냄비’를 운영 중이다. 하지만 기자가 자선냄비에 서 있는 동안 스마트자선냄비를 사용한 시민은 한 명도 없었다.
거리 모금이 어려워지면서 구세군 냄비 수도 줄었다. 구세군 관계자는 "지난해까지 443개였던 구세군 냄비 수는 올해 전년도의 80% 수준인 353개로 줄어들었다"며 "더구나 연말을 맞아 각종 거리 모금이 많아지면서 케틀메이트 자원봉사자 구하기도 예전처럼 쉽지 않아졌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