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수학 과목 출제 범위에서 기하, 벡터(vector)가 제외되면서 대학들이 교양 교육에서 '기초 과학·수학(BSM·Basic Science and Mathematics)'을 강화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 4차 산업혁명으로 불리는 인공지능(AI) 시대를 앞두고 있으면서 핵심이 될 수학과 과학에 대한 교육이 축소되고 있기 때문이다. 행렬은 2017학년도 수능부터 출제 범위에서 제외됐고, 지난해부터는 고교에서 아예 가르치지 않는다.
정부는 수능 수학에서 행렬·벡터 등을 뺀 주된 이유로 학생들의 학습 부담 완화를 든다. 하지만 대학에서는 이공계 학생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내용이 빠져 교육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된다고 우려한다.
특히 크기와 방향을 동시에 표현하는 벡터는 AI에서 데이터를 나타내는 방식이고 행렬은 빅데이터 등을 변환하는 기본 개념에 사용되기 때문에 AI 핵심 기술을 이해하기 위해선 반드시 익혀야 하는 기초가 된다. 배경율 상명대 교수는 "행렬·기하·벡터를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은 4차 산업혁명 방향과는 거꾸로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수학·과학 기본 교육 약화
지난해 서울대 공대가 고교에서 '물리Ⅱ' 과목을 이수하지 않은 신입생들에게 물리학 기초 과목을 1년 동안 의무 이수하도록 학칙을 개정했다. 선택과목이어서 고교에서 제대로 배우지 않고 대학에 진학한 학생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배영찬 한양대 교수는 "고교에서 물리·화학을 배우지 않은 학생이 공대에 입학해 물리 과외를 따로 받는 등 사교육에 의존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이달 초 발표한 '국제 학업성취도 평가(PISA)'에서 우리나라는 중3~고1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읽기·수학·과학 평가에서 과거 1·2위권에서 추락, 10위에 간신히 턱걸이했다.
물리학 박사인 신용현 바른미래당 의원은 "AI 시대에 수학·과학 교육은 아기가 말을 배우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필수 소양"이라며 "이제는 이과뿐 아니라 문과에서도 살아남기 위해선 폭넓게 교육해야 한다"고 말했다.
◇교양과목 수·과학 비중 미국의 3분의 1
27일 한국대학교육협의회 산하 한국교양기초교육원에 따르면, 국내 주요 대학의 인문·사회계열 학과에 개설된 교양과목에서 기초 과학·수학 영역이 차지하는 비중은 9~13%에 불과한 것으로 집계됐다. 하버드(30%), 예일(36%), 컬럼비아(32%) 등 미국 주요 대학들이 30% 이상인 것과 비교하면 3분의 1에 그친다.
교육계에서는 기하·벡터 등이 수능 출제 범위에서 제외되면서 대학의 기본 교육 중요성이 더 커질 것으로 보고 있다. 교육부와 교육청 등 교육 당국이 학습 부담 완화를 내세우며 학력 평가에도 부정적인 상황에서 대학마저 손을 놓으면 교육의 하향 평준화가 국가 경쟁력 하락으로 직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윤우섭 한국교양기초교육원장은 "이전보다 기초 과학 수학(BSM) 중요성이 더 강조되고 있는데, 정작 대학 교양 교육에서는 BSM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대학들이 책임감을 가져야 할 부분"이라고 했다.
◇백화점 문화센터식 교양과목 많아
국내 대학의 인문·사회계열에 개설된 교양과목의 60~70%가 인문·사회 분야로 치우쳐진 데다 내용도 학술적 의미가 크게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한국교양기초교육원이 지난해 전국의 10개 대학이 제출한 개설 교양과목을 학술성·보편성 등 기준으로 평가해보니 총 1565개 과목 가운데 부적합 판정을 받은 과목이 650개로 41.5%나 됐다. '음주문화와 술의 이해' '여대생의 자기관리와 실천 전략' '드립커피 추출' '하이힐과 건강 문제' 등도 교양과목으로 개설된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