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머니'에서 금융 비리 다루는 변호사 연기
'국가부도의 날' 김혜수, 독보적 리딩 보며 감탄
연기도 수련… 가야금 장인인 엄마, 언니와 늘 비교해
"공리, 장쯔이처럼 전통 예술 보여주는 배우 되고파"
한국판 '패왕별희' 나오면 영혼 팔아서라도 하고파
'극한직업'의 볼살 연기? 폭염 속에 뛰다 악관절 열려
13년 전, 이하늬에게 미스코리아를 권유한 사람은 어머니였다. 서울대 국악대학원에 다니면서도, 노래와 춤의 끼를 주체하지 못해 YG 오디션을 보고 연습생 생활을 했던 이하늬. 새벽까지 중학생들과 안무 연습을 하고, 오전엔 대학원으로 논문을 쓰러 가던 딸을 지켜보던 어머니가 말했다. "네 에너지가 정말 그쪽이라면, 일단 미스코리아에 나가보렴."
가야금만 하기엔 자신의 에너지가 좀 ‘셌다’며 이하늬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2019년은 털털한 하늬 씨의 전성시대였다. ‘극한직업'과 ‘열혈사제'로 코미디 퀸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악관절이 열리고 볼살이 출렁여도, 붉은 천을 향해 달려드는 황소처럼 카메라를 향해 전력질주했다. 형사든, 검사든, 변호사든... 남성 중심 조직에서 자연스럽게 힘의 하모니를 이뤘고, 동시에 그녀다운 칼칼한 에너지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최근 개봉한 영화 ‘블랙머니'는 일명 ‘론스타 먹튀 사건’을 다룬 경제 영화로, 이하늬는 슈퍼 엘리트의 길을 걸어온 통상변호사 김나리 역을 맡았다. 격정적인 검사 조진웅과 냉철한 변호사 이하늬의 조합은 이 영화의 백미이며, 그들이 얼마나 뚜렷한 열정을 갖고 이 작업에 임했는지를 보여준다.
현재 론스타는 한국 정부에 투자자 국가 간 소송(ISD)을 제기한 상태다. 패할 경우 국민 혈세로 내야 할 금액은 약 5조 3천억 원. 짜장면 10억 그릇에 해당하는 돈이다. 판결은 내년에 나온다.
바람이 많이 부는 어느 가을 저녁, 이하늬를 만났다. 긴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그녀가 들어서자 겸손한 기운으로 주위가 단정해졌다. 스윙이 느껴지는 음악적 발성, 클래식한 톤앤매너로 이하늬는 인터뷰의 짜임새를 스스로 조직해갔다.
효과음처럼, 2층 카페 창문이 간간이 바람에 덜컥이는 소리를 냈다. 가장 많이 쓴 단어는 ‘선순환'과 ‘수련'이었다.
-‘블랙 머니'는 IMF 이후, 외국 자본이 한 은행을 헐값에 인수한 후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떠난 사건을 다뤘습니다. ‘국가부도의 날'이 자동으로 연상되더군요.
"이 영화는 70조 가치의 은행이 1조 7천억 원에 넘어간 실제 사건을 다뤘어요. 예전에는 세상의 빛을 보기 힘들었던 주제잖아요. 확실히 지금 우리는 표현의 황금기를 지나고 있어요. 자유를 누리는 만큼 뭐가 진짜고 가짜인지 분별력도 절실하죠."
-금융 언어가 섞인 카리스마 넘치는 대사를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김혜수 씨를 떠올렸습니다. 참고했나요?
"(활짝 웃으며)김혜수 씨 작품을 거의 다 봤죠. 팬이에요. 특히 ‘국가부도의 날'은 최고의 연기였고, 그 독보적인 리딩을 보면서 멋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엔 좌중을 단번에 압도해버리는 영어 연기를 보며 이하늬의 지성을 의심할 수 없더군요(웃음). 물이 오를 대로 오른 배우의 활력을 느꼈어요. 사모펀드 CEO 스티븐 리에게 "일단 세금이나 갚으세요!"라고 경고할 때, "당신네 한국인들은 비합리적이다"라고 비웃는 부시에게 호통칠 때, 후련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다행이에요(웃음). 월가에서 일하다 한국에 자문하러 들어오는 역할이라, 동부권 월가에서 쓰는 지적인 플로어를 많이 연구했어요. 그 단호한 디테일이 살아야, 저를 믿어주실 테니까."
-‘극한직업'의 형사, ‘열혈사제’의 검사, ‘블랙머니'의 변호사… 최근 당신이 입은 캐릭터는 직업적으론 진부해도 특유의 생동감이 넘쳤어요. 다만 전작들과는 달리 이번엔 현실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제가 맡은 김나리는 미국에서 엘리트로 일하면서 느낀 게 많아요. 그녀만의 애국심과 정의가 있죠. 제조업 기반이 약한 한국은 무역으로 먹고살아야 하니, 제대로 된 무역 통상 로펌을 만들어보겠다는 결심이 있어요. 무엇이 진짜 국익인지, 그 과정에서의 불의는 어찌해야할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모피아의 세계는 매우 견고하더군요.
"슬픈 현실이죠. 저 또한 완전한 선과 악은 어려워요. 회색 지대에 머물면서 한 걸음씩 옮겨보는 거죠. 한편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건 이제 옛날 방식인 듯도 해요. 자신의 누명을 벗기 위해 불법도감청을 하는 양민혁 검사(조진웅 분)도 마찬가지고요."
전문성과 정통성은 이하늬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키워드다. 내가 그녀에게 처음 관심을 가진 건 2018년 평창 올림픽 폐막식에서 춘앵무를 추는 모습을 본 뒤였다. 이영희의 한복을 입고 한국의 ‘전통 예능인’으로 펼치는 그녀의 춤사위는 품위가 있었으며, 그 몸이 뿜어내는 에너지로 평창의 무대를 팽창시켰다. 미스유니버스에 나가 장구춤을 추던 이하늬, 카네기홀에서 가야금을 뜯던 이하늬… 4살 때부터 발화된 전통의 DNA는 어떻게 이하늬의 몸에서 영화 세계와 하모니를 이루어낸 걸까?
-평창 무대의 기억이 남다를 듯합니다.
"(반색하며)아, 기억해주시는구나. 폐막식 연출한 장유정 감독과 인연이 깊어요. 그분과 2010년 라이센스 뮤지컬 ‘금발이 너무해'를 1년 넘게 공연했어요. 전국 방방곡곡을 함께 다녔죠. 초창기의 저를 기억하는 분이고, 제 밝은 성정과 기질을 아셔서 후에 영화 ‘브라더'의 코믹 캐릭터로도 저를 쓰셨어요(웃음)."
-하지만 일각에서는 가야금 연주자가 어떻게 춤을 추느냐는 뒷말도 있었지요.
"국악의 장점은 악기 하나만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해금 명인이 판소리도 장구도 하지요. 저는 4살 때부터 가야금과 한국춤을 함께 배웠어요. 한국의 예술 형태는 그래서 더 흥미로워요. 판소리에서 구음을 딴 산조가 가야금의 백미예요. 산조를 잘하려고 판소리를 연마하죠. 정가를 하면 정악 음악은 저절로 알게 돼요. 20년 넘게 국악을 하면서 사사 받은 경험이 제 안에 하모니를 이루고 있어요."
-배우로서 전통 기예가 본격적으로 발휘한 적은 없는데, 갈증은 없나요?
"중국 배우들을 좋아해요. 공리, 장쯔이를 보세요. 그들은 자신의 전통문화에 기반한 교육을 받았어요. 해외 시장에 나갔을 때, 바로 그 점이 그들을 독창적이고 독보적으로 만들었죠. 다른 에너지, 다른 위엄이 있잖아요?"
언젠간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 같은 영화가 만들어지길 기대하며, 나서서 젊은 감독들을 국악 연주회에 초청한다고 했다. "제가 영감을 드려야죠. 한국 문화에 자주 노출해드리려고요(웃음)." 내친김에 연극영화과 학생들을 위한 전통문화 커리큘럼에 대한 생각도 펼쳤다.
"한예종은 전통예술원에서 배우지만, 일반 대학엔 그런 커리큘럼이 없어요. 셰익스피어 희곡으로 연기를 배우죠. 그런데 판소리를 하면 우리 말 연기에 굉장히 도움이 돼요. 판소리와 정가는 한글의 어간과 어미를 갖고 노는 데 최적화돼 있거든요. 뮤지컬은 영어가 착 붙고, 성악은 이태리어가 맞듯이, 그런 훈련을 받으면 연기 스펙트럼이 훨씬 넓어진답니다."
-바탕이 정말 튼튼하군요!
"하하. 제가 밑작업이 길었잖아요. 데뷔가 늦었어요. 2006년에 미스코리아 나와서 2007년에 미스 유니버스에 나갔고, 2008년에야 ‘폴라로이드'라는 작품으로 연기를 했어요. 이상한 건 4살 때부터 무대는 저한테 편안한 놀이터였는데, 연기로 서니까 완전히 다르더라고요. 긴장하는 저를 보면서 자문했어요. ‘이 상태로 평생 배우 할 수 있겠니?’ 수련해서 연마해야겠다, 결심했죠."
훈련이 아니라 수련이라는 단어가 신선하게 다가왔다.
-수련이라니요?
"(빙그레 웃으며)수련이죠. 4살부터 22년을 가야금을 해서 대학원에 가면 겨우 전문가 소리를 들어요. 그래도 ‘데뷔는 안된다’고 하죠. 배우라고 다르겠어요? 대중 앞에 서려면 수련의 깊이가 있어야 해요. 당시 20대가 얼마 남지 않았지만, 2009년 멀리 보고 뉴욕으로 떠났어요. 그때 제대로 한 공부가 지금 가장 큰 재산이 됐어요."
이하늬가 찾은 곳은 미국의 전문 배우들도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배우는 뉴욕의 HBO 스튜디오. 몸의 코어를 연결하는 알렉산더 테크닉, 보이스 트레이닝, 즉흥연기(물론 다 외워서 했지만!), 춤과 노래… 비주류 외국인으로서 1년 반의 고군분투는 알차고 귀했다.
-연기를 수련이나, 연마로 접근하는 것도 ‘장인' 가문의 영향인가요? 어머니가 중요무형문화재인 가야금 장인 문재숙 교수, 언니가 다보스 포럼에서도 연주하는 세계적인 가야금 연주자 이슬기로 알고 있어요.
"가까이서 보면 장인들의 삶은 정말 숭고해요. 얼마나 묵묵하게 고혈을 짜내야 얻을 수 있는 칭호인지… 저희는 노력한 만큼 아웃풋이 보여서 관객들에게 칭찬도 받죠. 언니는 탁월한 가야금 연주자인데도 노출된 저에 비하면 인정치가 턱없이 작아요. 작은 무대에 서기 위해서 인대가 늘어날 만큼 연습을 하죠. 그런데도 그 자리를 지키고 계신 어머니와 언니를 생각하면 저는 열심히 안 할 수가 없어요. 정신 바짝 차려야죠."
-그런 환경이 당신에게 축복이었겠지요?
"네. 하지만(가볍게 한숨 쉬며)... 제겐 어머니와 언니가 너무 큰 벽이었어요. 죽도록 한들 그들을 넘을 수 없었죠. 당대에 같은 연주자인데, ‘나는 안된다'는 상심이 깊었어요. 어릴 때부터 저는 ‘이하늬'로 존재한 적이 없었어요. 다들 ‘네 언니처럼, 네 엄마처럼' 이야기만 했어요.
엄마와 언니가 저의 원동력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힘들었어요. (미소를 머금으며)지금은 아니에요. 가장 다정한 나의 도움닫기, 뜀틀이죠. 그분들이 저의 사명감을 계속 일깨워요. 한국 문화가 이토록 훌륭한데, 그걸 안 알리면 직무유기라고요(웃음)."
-에너지, 긍정, 진정성 같은 단어가 하늬 씨와 촬영한 동료들에게서 후렴구처럼 나오더군요. 멀리서 걸어오는 이하늬의 발걸음 소리만 들려도 촬영장 공기가 산뜻해진다고요.
"하하하. 현장 에너지가 다운되면 제가 못 견뎌요. 우울한 사람이 있으면 다가가서 "괜찮아?"라고 묻죠. 발바닥에 있던 에너지까지 끌어다 써요. ‘케미'라는 게 별개 아니에요. 동료들의 좋고 나쁜 기운은 결국 자기한테 돌아와요. 그렇다면 나부터 ‘선순환'하자 싶은 거죠(웃음)."
-천만 배우로 활약한 ‘극한직업'은 행복했나요?
"하하. 아니요. 치열했어요. 어디까지 나를 내려놓아야 하나…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자괴감에 시달렸죠. ‘내가 이거밖에 안되나... 감독의 디렉션에 이 정도밖에 응답을 못 하나’. 완벽히 소화하지 못하고 연기를 끝낼 때 치욕스러운 기분마저 들었어요. 관객과 만날 땐 불안이 극에 달했죠. ‘우리끼리만 재밌는 거 아닐까? 타이밍이 잘 맞는 걸까?’"
코미디 영화를 찍으면서 밤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꿈을 꿨다고 했다. 스스로 재밌어서 웃음을 터뜨린 장면이 하나도 없다는 말에 가슴이 아렸다. "조마조마했어요."
해체 위기의 마약반 형사 5인방을 그린 영화 ‘극한 직업'에서 이하늬는 ‘여형사’가 아닌 ‘장 형사’를 연기했다. 출렁이며 떨리는 볼살을 그대로 보여주며 달리는 여형사가, 한국 영화에 또 있었던가.
-‘아, 저 사람이 모든 걸 내려놨구나’ 진심이 느껴지더군요. 아이러니하지만 당신이 미모를 허물어뜨린 후에야 이하늬를 배우로 찬찬히 들여다보게 됐어요.
"(코를 찡긋하며)그때가 120년 만에 극심한 폭염이 덮친 때였어요. 현장에 모든 게 녹아내렸어요. 5일 동안 그 장면을 촬영하는데, 마약범 ‘환동’이는 한번 뛰다 응급실에 실려 갔어요. 저는 너무 튼튼해서 5일 내내 달려도 괜찮았어요(웃음).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더운 열기에 뛰다가 악관절이 확 열렸죠. 감독님은 카메라에 잡힌 그대로 쓰셨고."
촬영 내내 자학했지만, 동료들과 밤을 새워 ‘으샤으샤' 액션 장면을 찍을 땐 그 혹독함이 오히려 희열이더라고.
-대체로 나약하고 의존적인 신데렐라 캐릭터가 아니라 ‘할 말 다 하는’ 현대적인 여성을 연기한 건, 스스로의 선택이었지요?
"네. 전 동의가 안 되면 불편해서 못해요(웃음). 연기하고 나면 후련합니다."
-누굴 닮았나요?
"과거엔 어머니의 위트를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엔 아버지를 더 닮아가요. 아버지가 공무원이셨는데(경찰대학 총장, 국정원 2차장을 역임했다), 평생 성실하셨어요. 악기로 훈련하면서 어떤 수준까지 이르지 못하면 부끄럽게 여기는 마음이 제게 있어요. 대입 시험에 베토벤 5분 치자고, 매일 10시간씩 연습하는 그런 성실함은, 다 부모님에게 받은 거죠."
-어떤 감독을 존경합니까?
"정지영 감독이요. ‘부러진 화살'을 3번 정도 봤어요. 기교 없이 묵직하게 사회에 할 말을 하는 영화를 만드셨어요. 청년 같은 열정으로 현장에선 늘 뛰어와서 제게 디렉션을 주셨죠. 그분 연세가 74살이세요."
-어떤 배우를 사랑하나요?
"최민식 씨요. 그분은 굳은살 배긴 몸에 생살을 남겨두는 분이에요. 본능과 생기를 드러내는 걸 불편해하지 않아요. 저도 안주하지 않는 아티스트이고 싶어요. 연기, 연출, 그림, 음악 어떤 장르든 아티스트가 안주하면 이상해져요. 자기 수련이 안 되면 빛을 잃죠. 결함이나 열등감이 있어도 항상 조금씩 나아지는 나를 보고 싶어요."
-최민식은 정작 당신의 ‘진정성’에 찬사를 보내더군요.
"(눈을 빛내며)그분은 가히 대한민국 최고의 진정성 보유자예요. 제게서 스킬이 아니라 진정성을 보셨다니, 감사하죠. 영화 ‘침묵'은 가수와 재벌 회장의 멜로를 그린 미스터리물이었어요. 최민식 선배의 눈을 보면,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요. 가죽이 아닌 영혼을 사랑하게 만드는 눈이었죠."
-‘침묵’을 함께 한 정지우 감독에게선 무얼 배웠죠?
"그분은 제 은인이세요. 현장에서 절대적인 믿음을 선물로 주셨어요. 그 소중한 걸 받았으니 정말 제 껍질이라도 벗겨서 다 털어드리고 싶었어요. 믿어주는만큼 부응하고 싶었죠. "당신, 괜찮아?" "난 괜찮아." ‘침묵'이라는 영화를 통해 성숙한 사랑이 뭔지도 배웠습니다."
-‘극한 직업'의 이병헌 감독에겐 양가감정이 남아있나요?
"촬영 내내 제가 그의 독특한 화법을 따라가지 못해 자책했을 뿐. 이병헌 감독은 천재예요. 나중엔 ‘오케이라고나 할까' 하면 소리를 질렀어요. ‘제발 정확하게 말해줘. 좋은지 아닌지!’(웃음)."
-서울대 재학 시절은 즐거웠습니까?
"스키부에서 몇 달씩 먹고 자고 합숙 훈련을 했어요. 이상한 행동, 재미난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당신의 서가에서 가장 중요한 책은 뭐지요?
"성경이요. 6번째 통독 중입니다. 읽을수록 뇌의 노폐물이 빠져나가고 무의식에 깊이가 생겨요. 모르고 읽어도, 결국은 깨달아지는 게 신기해요. 가장 크게 배운 건 자족이에요. 오늘 주어진 은혜에 만족하는 법... 만족을 모르면 감사가 없고 감사를 모르면 행복하지 않죠. 그건 배우에겐 치명적이에요."
자족을 모르면, 한 치 앞도 모르는 삶을 어떻게 살아가겠느냐고, 그녀가 나지막이 시편 23편을 암송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아름다움은 당신에게 무엇인가요?
"미스코리아로 데뷔해서 저는 대중들이 저한테 ‘예쁨'을 원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배우 이하늬에게 원한 건 못생겨 보여도 괜찮은 연기였죠. ‘타짜2’와 ‘침묵'에서 얼굴 근육을 제멋대로 구기기 시작했어요. 추함을 노출하고 나면 연기의 영역이 한없이 풍부하고 넓어져요. 제 얼굴이 좀 판타지하고 선이 뚜렷한데, 앞으로 더 현실성 있는 얼굴이 되면 좋겠어요."
-미인대회에 나가 깨달은 게 있습니까?
"처음엔 나는 동양인이고, 8등신 서양 미인들과는 상대가 안 될 것 같았어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한국 전통 콘텐츠가 더해지니, 일대일로 붙어볼 만 했죠. (눈을 크게 뜨고)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다,라는 말이 진짜였어요. 25살에 그걸 알았으니, 감사한 일이죠. 지금 BTS가 봉준호 감독이, 그걸 증명하잖아요. 한국에서 독보적이면 세계에서도 최고예요!"
신경증이나 불안이 없는 여배우, 막힘 없이 사유를 펼쳐내는 한 사람과 마주하자니, 겨울 수목원에서 싱그러운 산소를 흡입하는 느낌이다.
-대체 어떻게 그토록 처음부터 끝까지 건강하고 긍정적일 수 있지요? 에너지를 아끼는 게 아니라, 아낌없이 주고도 계속 충전되는 고성능 배터리 같네요.
"최인철 교수가 ‘행복론’ 강의에서 그러시더군요. ‘행복해지고 싶으면 운동하세요!’ 사실이에요! 신체적으로 넉넉해지면 많은 걸 담을 수 있어요. 인간 이하늬를 지탱하는 건 튼튼한 몸이에요."
-일상의 루틴은 어떻게 유지하나요?
"오전에 운동과 요가로 수련을 해요. 그렇게 선순환으로 선수를 치면, 하루가 단단해져요. 좋지 않은 생각이 들어와도 몸이 굳건하면 다시 시작할 수 있지요. 그래서 아침의 스타트가 중요해요. 저는 흥이 많아 잉여 에너지가 있어도, 낭비하지 않고 잘 모아뒀다가 현장에서 마음껏 쏟아부어요(웃음)."
그렇게 좋은 에너지를 모으고 절제해서 만든 영화가 ‘블랙머니'라고 검은 눈을 빛냈다. 씩씩하고 기지가 있고 좌우 균형이 명료한 눈이었다. 긴 인터뷰 시간동안 자세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어떤 영화를 반복해서 봅니까?
"‘파이란'과 ‘침묵이요. 공리의 ‘인생'도 틈날 때마다 봅니다. 한국판 ‘패왕별희'가 나온다면 영혼을 팔아서라도 하고 싶습니다(웃음)."
-국악은 당신에게 무엇인가요?
"뿌리 그 자체. 항상 돌아가고 싶은 고향이죠."
이하늬는 박찬욱, 봉준호, 배두나가 소속된 할리우드 에이전시 WME와 계약했다. ‘할리우드 리포트’와 ‘버라이어티’가 그 사실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스윙과 딕션이 탁월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블랙 머니'의 연기를 보고 있자니, 이하늬의 글로벌 무대가 벌써부터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