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 시절 특정 보수 단체의 명단인 이른바 ‘화이트리스트’를 만들어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등에게 자금을 지원하도록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김기춘(80)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항소심에서도 실형을 선고받았다.
서울고법 형사4부(재판장 조용현)는 12일 오후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등의 혐의로 기소된 김 전 실장에게 직권남용 방해죄와 강요죄를 모두 유죄로 인정하고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조윤선(53) 전 청와대 정무수석에게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함께 재판에 넘겨진 허현준 전 청와대 행정관은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박준우 전 청와대 정무수석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현기환 전 청와대 정무수석은 징역 2년 10개월에 처해졌다. 신동철·오도성·정관주 전 청와대 비서관에게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재판부는 "김 전 실장 등은 정치적 성향·이념이 다르거나 정부 정책에 반대하고 정부를 비판하는 개인이나 단체를 소위 ‘좌파 세력’으로 규정했다"며 "이를 견제하고 국정에 우호적인 여론을 형성하기 위해 보수 시민단체를 도구로 활용하기로 계획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대통령비서실이라는 막강한 지위와 권한을 이용해 정치권력에 취약할 수 밖에 없는 전경련에 보수단체 자금 지원을 강제했다"며 "이 같은 범행은 정치적 유·불리에만 기초해 사상의 자유와 다원성을 근간으로 하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한 중대한 침해행위"라고 했다.
재판부는 또 "범행으로 인해 전경련의 사적 자치, 의사결정의 자유와 함께 결과적으로 그 재산권까지 침해됐고,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의 유착관계를 초래해 이를 바라보는 국민들에게 깊은 불신을 안겨줬다"고 했다.
재판부는 "김 전 실장은 이 사건의 시발점이자 기획자, 기안자로 보인다"며 "청와대 비서실장으로서 대통령비서실 내에서 보수 시민단체에 대한 자금지원 및 활용을 강조하는 기조를 적극 형성·강화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전경련을 통한 보수 시민단체 자금지원 및 국정현안에 대한 보수 시민단체 활용 체계를 구축했다"며 "대통령비서실의 지위와 권한을 이용해 조직적으로 이뤄진 범행인 이상 그 체계를 만들고 하급자들에게 지시한 김 전 실장의 책임은 매우 무겁다"고 했다.
재판부는 김 전 실장의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혐의를 무죄로 인정했던 1심과 달리 이를 유죄로 판단했다. 다만 선고형량은 그대로 유지했다. 재판부는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혐의와 강요죄는 상상적 경합범의 관계에 있다"며 "한 개의 행위가 수 개의 죄에 해당하는 경우로 중한 죄에 정한 형으로 처벌하도록 돼있다. 이 부분은 전체적으로 1심의 형량에 반영돼 있다"고 판단했다.
김 전 실장과 조 전 수석은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전경련을 압박해 기업이 친정부 성향 보수단체 33군데에 69억원을 지원하게 한 혐의 등으로 기소됐다. 조 전 장관과 현기환 전 정무수석은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각각 4500만원, 5500만원 수수한 혐의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