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7월 17일 공포된 대한민국 제헌헌법의 전문(前文)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 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로 시작된다. 대한민국 정통성의 연원이 1919년 3·1운동과 그 결과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있음을 밝힌 것이다.

제헌헌법에 '임정 계승'이 명시되도록 주도한 사람은 이승만이었다. 제헌헌법 초안을 기초한 유진오나 이를 토대로 제헌헌법안을 마련한 제헌국회 헌법기초위원회는 전문에 3·1운동만 넣었을 뿐 임정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국회 본회의 심의에서 초대 국회의장 이승만이 3·1운동 후 대한민국 수립을 선포한 사실을 넣자고 제안했다.

이승만의 제안이 받아들여진 것은 대다수 제헌의원도 비슷한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헌법기초위원장 서상일 의원은 헌법 심의 과정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입장을 거듭 밝혔다. 유진오도 "제헌헌법 초안을 기초할 때 임정이 제정한 대한민국임시헌장과 건국 강령의 이념을 반영하려고 노력했다"며 "정신적으로 대한민국은 임정을 계승하여 수립됐다"고 했다.

일제 패망 후 1진과 2진으로 나누어 환국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이 1945년 12월 6일 임정 집무실이 자리 잡은 서울 경교장에 모였다. 앞줄 왼쪽부터 장건상·조완구·이시영·김구·김규식·조소앙·신익희·조성환, 뒷줄 왼쪽부터 유진동·황학수·성주식·김성숙·김상덕·유림·조경한·김붕준·유동열·김원봉·최동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 명문화됐던 '임정 계승' 정신은 1950년대를 지나면서 점차 희미해져 갔다. 제1공화국은 독립운동의 공적을 이승만에게 집중시키며 임정과 다른 독립운동가들을 기리지 않았다. 1949년 4월 건국공로훈장이 제정됐지만 1960년까지 이 훈장을 받은 23명 가운데 한국인은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 초대 부통령뿐이었다. 이들도 독립운동이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대한 공로가 훈장 수여 이유였다. 나머지 21명은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도운 미국인과 6·25전쟁 때 한국을 지원한 외국인 등이었다. 이승만 집권 기간 그를 기리는 동상과 기념비는 8개나 세워졌지만 임정에 관한 상징물은 하나도 건립되지 않았다.

이는 제1공화국의 정치를 주도한 이승만 대통령과 한민당 세력이 임정을 부각시키는 데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강조한 대한민국은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서울에서 수립됐던 한성정부였다. 한성정부의 최고위직인 집정관총재에 추대됐고, 이어 1919년 9월 상해·노령(露領)·한성정부를 통합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에 선임됐던 이승만은 국민적 호소력이 강했던 '임정 법통론'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활용하려고 했다. 또 북한 정부와의 민족사적 정통성 경쟁이 시작되면서 '임정 계승'을 통해 명분의 우위를 차지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 목적은 점차 흐려졌고 임정에 대한 강조도 사라져갔다. 한편 광복 직후 임정 봉대에 앞장섰던 한민당 세력은 대한민국 수립 과정에서 임정과 갈등하게 됐고, 조소앙 등 임정 내 대한민국 지지파들의 정치 참여를 반기지 않았다. 따라서 1950년대에 야당도 '임정 계승'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이처럼 국가 운영에서 '임정 계승' 인식은 지워져 갔지만 헌법 전문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계승'은 그대로 남았다. 제1공화국 시절인 1952년과 1954년의 두 차례 개헌과 4·19혁명 이후 이뤄진 두 차례 개헌도 이 부분은 손대지 않았다. 그러다가 5·16쿠데타 뒤인 1962년 12월 공포된 제3공화국 헌법에서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4·19의거와 5·16혁명의 이념에 입각하여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건설함에 있어서'로 바뀌었다. 3·1운동만 남고 '임정 계승'은 빠진 것이다.

독립운동가들과 일부 학자들은 일본군 장교 출신인 박정희가 임정과 독립운동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헌법 전문에서 '임정 계승'을 뺐다고 주장했다. 광복군 장교 출신인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은 "역사 인식과 민족 인식을 잃은 행위"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독립운동가들에게 대거 건국훈장을 수여하고 그들에 대한 보훈이 본격화된 것은 박정희 정부에서였다. 박정희는 집권 다음 해인 1962년 김구·안창호·안중근·윤봉길 등 208명의 독립운동가를 포상했고, 1963년엔 이범석 등 229명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했다. 1968년에도 103명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했다. 3·1운동 50주년인 1969년 서울 남산에 김구 동상이 세워졌다. 역사 교육도 3·1운동과 임정을 비롯한 독립운동사를 비중 있게 다루기 시작했다.

한 연구자는 "역사적 정통성이 미약했던 박정희는 독립운동가 및 임정 요인에 대한 국가적 보상을 통해 대중적 지지를 얻고자 했다"고 분석했다. 김구 주석의 아들인 김신 전 교통부 장관은 회고록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집권하면서부터 독립 유공자들을 돌보는 데 힘썼다. 내 기억으로는 박정희 대통령만큼 독립 유공자를 위해 힘쓴 대통령은 많지 않았다'고 썼다.

그러나 독립운동 관련 단체들은 헌법 전문에서 '임정 계승'이 빠진 것에 불만이었다. 제5공화국 말기인 1986년 개헌 논의가 시작되자 이들은 헌법 전문에 다시 임정 계승을 넣을 것을 주장하고 나왔다. 이들의 주장은 언론을 비롯한 여론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여당인 민주정의당과 야당인 통일민주당은 새 헌법에 '임정 법통 계승'을 넣는 데 합의했다. 1987년 10월 국민투표로 확정된 헌법의 전문은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 계승하고"라고 명시했다. 대한민국의 '임정 계승'을 제헌헌법보다 더 분명하게 선언한 현행 헌법은 이렇게 탄생했다.

줄곧 임정 폄하했던 좌파, 건국절 논쟁 우파 내에서 일자 돌연 임정 옹호
박헌영 "임정은 망명자 클럽일 뿐", 학계 "최근의 전향은 정치적" 냉소

좌파는 광복 직후부터 '임정 법통론'에 부정적이었다. 박헌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인민과 단절된 망명자 클럽에 불과하고 법통을 주장하는 것은 과대평가라고 폄하했다. 임정 수립 초기에 참여했던 여운형은 환국한 임정을 '노인들뿐이요, 밤낮 앉아 파벌 싸움이나 하는 무능 무위한 사람들'이라고 깎아내렸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좌파가 대거 월북하고 뒤이어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남한에서 좌파적 임정 비판은 사라졌다. 그러다가 한 세대가 지난 1980년대 후반 좌파적 민중사학이 대두하면서 임정 법통 부정론이 다시 제기됐다. 민중사학자들은 임정이 독립운동 단체에 불과했으며 민족 해방 운동의 영도 기관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민중사관에 따른 연구서나 대중서는 임정을 언급하지 않거나 부정적으로 서술했다. 그들은 "임정의 정통성을 강변하는 것은 남한 단정 수립을 합리화하려는 역사 왜곡"이라고 주장했다. 헌법 전문에 '임정 법통 계승'이 들어가자 "임정에 대한 객관적 평가마저 정치적 판단에 따라 제약받게 됐다"고 비판했다.

2000년대 들어 민중사학 일각에서 '민주공화정으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주목하는 연구 경향이 생겨났다. 하지만 대다수는 여전히 남북한 대립 상황에서 임정 법통성이 지니는 정치적 의미를 경계했다. 그런데도 우파 내부에서 건국절 논쟁이 벌어지자 일부 좌파 인사가 갑자기 임정의 역사적 의의를 옹호하고 백범기념관으로 몰려가 행사를 열기 시작했다.

이런 어색한 모습에 대해 한 젊은 민중사학자는 "학문의 '전향'이라고도 할 수 있는 상황을 시대적 과제에 따른 선택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면 이해되는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고 냉소적으로 언급했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라면 학자로서는 자살이나 다름없는 학문적 '전향'을 전향 선언도 없이 슬그머니 하는 선배들을 꼬집은 것이다. 또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이어지는 것을 보다 못한 신복룡 건국대 명예교수는 "진실로 김구를 숭모하는 사람이라면 자칭 진보라는 좌파에서 김구를 구출하는 것이 먼저 해야 할 일"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