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첫 공개적 비핵화 조치가 될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23~25일) 행사에 우리 언론은 초대받지 못했다. 하지만 북한은 풍계리 폐쇄 행사를 취소하지 않았다. 우리 측 취재진을 제외한 미국과 영국, 러시아, 중국 등 4개국 외신기자단은 22일 취재를 위해 중국 베이징에서 고려항공 전세기를 타고 원산으로 갔다. 우리 언론만이 초대를 받지 못하고 ‘문전박대’를 당한 것이다.
◇北 “북미 좋아진다고 북남 좋아지지 않아” 노골적 압박
정부는 “북측이 핵실험장 폐기 행사에 우리 측 기자단을 초청했음에도 불구하고, 후속 조치가 없어 기자단 방북이 이루어지지 못한 데 대해 안타깝고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했지만, 북측의 반응은 없었다. 북측은 대신 선전매체를 동원해 “미북 대화가 진전돼도 남북회담 중지사태는 해소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외교가 안팎에서는 “남한의 도움으로 위기 국면을 벗어난 북한이 또다시 ‘코리아패싱’을 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왔다.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는 조총련 기관지인 조선신보는 22일 “조미(미북) 대화에서 진전이 이루어지면 (남북) 고위급회담을 중지시킨 사태도 저절로 해소되리라고는 볼 수 없다”고 했다. 조선신보는 이날 ‘조선(북한)은 평화의지 실천, 미·남은 전쟁연습 골몰’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북을 겨냥한 전쟁 소동이 계속된다면 북남 고위급회담의 중단 상태도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이같이 주장했다.
신문은 “합동군사연습은 적대시 정책의 노골적인 표현이며 핵전략자산이 투입되는 군사연습은 핵위협 공갈 그 자체”라며 “판문점 선언을 지지한 미국의 속내는 실천 행동을 통해서만 증명되게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최근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이 미국의 ‘리비아식 핵포기’를 비난한 것에 대해 “트럼프가 폼페이오 국무장관을 통해 조선의 최고 영도자(김정은)에게 전달한 ‘문제해결을 위한 새로운 대안’이 리비아 핵포기 방식이 아니라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북한은 지난 16일 연례적 한미연합공중훈련인 ‘맥스선더(Max Thunder)’를 이유로 공식적인 대화 채널을 끊은 이후 선전매체를 총동원해 대남 공세를 강화해왔다. 태영호 전 영국 공사를 특정해 비난하고, 지난 2016년 중국 류경식당에서 온 탈북 여종업원들의 송환을 요구했다. 여기에 대북 전단 살포까지 비난했다.
◇ “북, 한국 이용하고 토사구팽하는 패턴 반복”
전문가들은 북한이 또다시 지난 수년간 보여줬던 전형적인 대남 비난 패턴을 재연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남성욱 고려대 교수는 “북한은 항상 이런 대화 패턴을 보여왔다”며 “국제적으로 몰린 상황에서 위기 탈출을 위해 한국을 이용하고, 사정이 나아지면 토사구팽하는 것”이라고 했다. 최근 국제사회에서 수세에 몰렸던 북한이 미국과 직접 대화를 하고, 중국과의 관계를 회복하면서 한국을 ‘용도 폐기’했다는 것이다. 남 교수는 “한국과 정상적으로 교류하는 것은 사실 북한의 관심사가 아니다”라며 “북한은 미국을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결국 문재인 대통령에게 남북 교류를 하려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설득하라는 압박을 넣고 있다”고 했다.
한 국책연구소 관계자는 “북한은 자신들의 통미봉남(通美封南) 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꾼 적이 없다”며 “한때 우리 정부가 적극적인 역할을 한 것처럼 보였지만, ‘중매자’의 역할이 수명을 다하자 다시 한번 코리아패싱을 당하고 있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미국과 북한을 비핵화 대화로 이끌면서 우리 정부가 중매쟁이를 자처했지만, 결국 이 역할이 부메랑이 돼 미국과 북한 양쪽에서 압박을 받는 샌드위치 신세가 된 셈”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