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전자상가, 흘러간 한국의 IT 메카에서 시작된 제조 창업 부활의 움직임. 그 중심에 ‘하드웨어 전문 스타트업 엑셀러레이터’ N15(엔피프틴)이 있다. 미국과 유럽, 아시아를 잇는 글로벌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드론, 3D프린터, 사물 인터넷, 로봇, 웨어러블 등 미래 우리의 먹을거리 산업을 이끌어갈 스타트업 키우기에 나선 이들의 목표는 미국 애플과 중국 샤오미(小米)의 뒤를 잇는 하드웨어 스타트업 신화의 주인공을 바로 한국에서 탄생시키는 것이다.

창조경제대상의 주인공들, 용산에 모이다

서울 용산전자상가 나진 15동. 전자부품이라면 없는 게 없어 도깨비상가라는 이름으로 유명세를 떨쳤던 이곳이 N15의 둥지다. 826㎡(약 250평) 규모의 옛 지하주차장, 3D프린터와 레이저커터 등 소형 제조시설과 책상마다 눈에 띄는 전자부품들은 한눈에 봐도 이곳이 ‘뭔가를 만들기 위한’ 공간임을 말해준다.

“뜯고, 조립하고, 납땜하고, 두드리며 일하기에 가장 편한 곳이죠. 한두 걸음만 가면 필요한 전자부품을 모두 구할 수 있으니까요. 이곳은 최고의 제조 창업 기반을 갖춘 곳입니다.”

하드웨어 스타트업 엑셀러레이터 N15의 허제(31) 대표는 용산전자상가의 인프라야말로 N15의 강력한 경쟁력 중 하나라고 말한다. N15이 나진상가 15동을 의미하는 것도 한국의 제조 창업문화를 이곳 용산에서 만들어가겠다는 큰 꿈에서 비롯되었다.

스타트업 엑셀러레이터란 우수한 스타트업의 빠른 성장을 위해 창업 전반에 도움을 주는 조력자를 말한다.

자금을 직접 투자하는 VC(벤처캐피털)와 달리 이들은 투자유치를 비롯해 입주 공간, 디자인 및 기술 자문, 시제품 제작에서 더 나아가 양산, 유통까지 폭넓은 전문 서비스를 제공한다. N15은 여기에 스타트업의 글로벌 시장 진출을 지원하는 ‘특화된’ 프로그램을 강화하면서 최근 정부기관과 기업의 뜨거운 관심과 러브콜을 받고 있다. 경기창조경제혁신센터와 MOU를 맺고 하드웨어 스타트업의 글로벌 진출을 돕고 있으며, 그린칩스, 네패스, 휴맥스 등 굵직한 기술 중심 기업들과 오픈 이노베이션(Open Innovation)을 비롯한 협력도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창업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울 만큼 역동적인 활동 뒤에는 오랫동안 제조 분야에서 창업을 꿈꾸며 준비해온 치밀함이 있다. 허 대표는 대학에서 화공학을 전공했지만 미국회계사(USCPA)를 공부하고, 삼일회계법인에서 감사와 컨설팅 업무를 담당한 이력을 갖고 있다. 회계는 오로지 훗날 창업을 했을 때 경영자로서 ‘수’에 대한 감각을 익히기 위한 공부였다. 이 시기 그는 저서 《3D프린터의 모든 것》도 출판했다.

“대학시절, 미국에서 교환학생 연수 중 보잉사를 견학했는데, 그때 3D프린터라는 걸 처음 봤어요. 일부 비행기 부품을 3D프린터로 만든다는 설명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귀국 후 수년간 3D프린터에 대한 해외 선진국의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차곡차곡 정리했다. 3D프린터의 등장으로 세계 제조환경은 이미 놀라운 변혁의 시대로 접어들었지만, 당시 한국에서 3D프린터는 여전히 낯선 용어에 불과했다.

낮에는 회계사로 근무하고, 밤부터 새벽까지 잠을 줄여가며 쓴 그의 책은 이 분야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후 비영리 창업지원기관 타이드 인스티튜트에서 본격적으로 하드웨어 스타트업 엑셀러레이터로서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그는 이때 엑셀러레이터가 심장을 펄떡이게 할 만큼 재미있고 보람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2014년, 프로젝트의 성공적 기획과 운용으로 창조경제대상을 수상했고, 같은 팀에서 함께 상을 수상한 동료들은 N15의 공동 창업자가 되었다.

16개 글로벌 엑셀러레이터와 손잡다
드론 제작과정과 비행 시연(드론톤대회). N15의 입주기업 얼티메이트 드론은 산업용 드론 개발로 영국 엑셀러레이터 프로그램에 진출했다.

4명의 공동 창업자가 의기투합해 사무실을 오픈하고, N15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적극 활용한 입주 프로그램 ‘드래곤 레볼루션(Dragon Revolution)’을 선보였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입주기업은 N15에서 자유롭게 시제품을 제작할 수 있다. 또 격주로 진행되는 국내외 하드웨어 전문가와 네트워킹 및 VC 데모데이 참석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리고 3개월 후에는 중국 선전 등 글로벌 엑셀러레이터의 VC 데모데이에 참여할 수 있도록 프레젠테이션 등 다양한 자문을 제공한다.

아이디어와 기술을 갖고 창업을 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제조 분야의 창업이 어려운 진짜 이유는 후속 작업으로 시제품을 만들고, 투자를 유치하고, 양산과 유통에 이르기까지 큰돈이 들고 오랜 시간에 걸쳐 체계적인 시스템을 구축해야 하기 때문이다. 제조분야의 창업은 한마디로 새로운 생태계를 만드는 일이다. N15이 특히 중국 선전과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세계 제조창업의 중심지 선전은 놀라운 제조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필요한 모든 부품과 시설이 있고, 시제품 제작비용이 한국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 게다가 최고의 글로벌 엑셀러레이터와 VC들이 모여 있는 만큼 R&D는 물론 투자의 기회도 크게 열려 있다. 선전에는 N15을 위한 프로그램이 별도로 진행될 정도로 탄탄한 네트워크가 구축되어 있다. N15은 현재 중국・미국・영국・독일・대만・싱가포르 등 6개국 16개 엑셀러레이터들과 MOU를 맺었다. 이 중에는 세계적인 스타트업 엑셀러레이터 PCH INTERNATIONAL과 중국의 대표적 VC인 SCIG(선전창조경제 투자자 그룹)도 포함되어 있다.

“각국의 엑셀러레이터는 저마다 특징이 있어요. PCH INTERNATIONAL의 경우 전 세계를 무대로 하드웨어 스타트업을 발굴하고, 시제품 제작과 양산, 그리고 자사의 온라인 쇼핑몰을 통해 판매까지 지원해줘요.

영국은 기술과 투자환경이 좋아요. 큰 규모의 투자유치가 가능하죠. 얼마 전 N15의 입주기업 두 곳이 영국 엑셀러레이팅 프로그램에 진출했어요. 저희 프로그램과 네트워크를 통해 해외로 진출한 첫 사례입니다.”

평균연령 33세의 젊은 기업 N15. 하지만 국내 굵직한 변호사·변리사· 동시통역사·언론인·투자전문가·디자이너·엔지니어 등 10여 명이 넘는 각 분야 전문가들이 팀원으로 참여, 컨설팅을 제공한다.

산업용 드론을 개발한 얼티메이트 드론(Ultimate Drone)과 스마트 농기구를 개발한 석시드(Sucseed)는 현재 영국 셰필드에서 R&D를 진행 중이다. N15은 이들의 뒤를 이어 더 많은 입주기업이 글로벌 엑셀러레이팅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도록 영어 피칭(English Pitching) 컨설팅을 강화하는 한편, 국내 최초로 ‘드론톤 대회’를 기획, 주최하고 있다.

드론톤 대회는 마라톤을 하듯 일정시간 쉬지 않고 아이디어를 직접 기획해 결과물을 만들고 경연하는 해커톤(Hackathon)과 드론을 접목한 행사다.

N15이 이 대회를 기획한 이유는 “대중적 관심이 높은 드론을 통해 스마트 기술과 연계된 제조 창업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높이기 위해서”다. 6월과 8월 두 차례 대회를 마친 후, 벌써부터 다음을 기약하는 기관과 참가자들의 기대가 뜨겁다.

“10월에는 영국에 있는 우리 팀을 보러 가야 하고, 11월에는 한 달 동안 선전에 머물러요. 싱가포르 출장도 있는데, 가는 길에 홍콩에 잠시 들러 그곳 엑셀러레이터와 미팅도 해야 해요.”

지금껏 숨 가쁘게 달려왔지만, 허 대표는 앞으로 더 바쁠 예정이다. N15의 글로벌 네트워크가 촘촘하고 단단해질수록 실력 있는 한국 스타트업의 해외진출 기회도 더 많아질 것이다. 멀지 않은 미래에 용산전자상가 나진15동의 지하주차장에서 N15와 함께 성장한 한국의 애플과 샤오미의 스토리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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