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업 작가들로서는 보물창고를 얻은 것과 같다. 사실을 토대로 그 위에서 상상력을 발휘하는 우리로서는 아주 좋은 놀이터가 될 것."(만화 '이끼' 작가 윤태호씨)

"세계적인 콘텐츠인 해리포터 시리즈도 그 나라의 신화가 발굴되고 집적되면서 나온 성과물이다. 우리도 2000년대 와서 국학 붐이 일었지만, 작가들도 기본적으로 사실을 많이 알아야 직조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반갑다."(시나리오 작가 김정미씨)

한국국학진흥원(원장 김병일)이 7일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한 자료 사이트 '스토리 테마파크'(sto ry.ugyo.net) 시연회는 청중들의 열기로 뜨거웠다. 드라마·영화·만화 등 콘텐츠 제작자들은 그동안 쌓였던 스토리 자료에 대한 갈증이 풀렸다는 표정이었다. 국학진흥원이 이날 공개한 자료는 조선시대 민간 일기 600건을 디지털 자료화한 것. 국학진흥원이 이들 자료를 디지털화한 것은 국내 콘텐츠 제작자들에게 '해리포터 이야기를 능가할 국제적 스토리텔링의 보고(寶庫)'를 제공하겠다는 야심에서다.

알려진 대로 2006년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왕의 남자'만 해도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한 대목에서 비롯됐다.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으면 아무리 곡식이 있더라도 내가 먹을 수 있으랴' 공길의 이 말에 왕은 불경하다 하여 곤장을 쳐서 먼 곳으로 유배했다." 2007년 화제가 된 연극 '코끼리와 나'도 마찬가지였다. 태종 12년 일본이 대장경을 얻기 위해 조선에 코끼리를 바쳤으나 코끼리가 관리를 밟아 죽인 죄로 귀양을 가게 된다는 실록의 기록이 단서였다.

조선시대 민간의 일기 600건을 디지털 자료화한‘스토리 테마파크’시연회가 열린 7일 국립중앙박물관 강당은 관심을 가진 시민들로 꽉 찼다.

역사적 사실과 작가적 상상력의 결합인 팩션(faction) 사극 전성시대다. 과거 삼국사기나 조선왕조실록 같은 정사(正史)에 의존한 영웅 이야기로 통했던 정통 사극은 점점 미시 생활사와 작가의 발랄한 상상력이 더해지는 퓨전 사극으로 진화하는 상황. 이날 소개된'스토리 테마파크'는 이런 팩션 창작의 기세에 날개를 달아주는 셈이다.

현재 '스토리 테마파크'엔 서원일기 101건, 유산일기 119건, 전쟁일기 75건, 생활일기 206건, 사행일기 25건, 분쟁일기 101건 등이 올라 있다. 연내 600건이 더해진다. 앞으로 1만건을 목표로 한다.

내용도 다채롭다. 과거를 앞둔 아들을 위해 이전 합격자의 붓을 빌리고, 규격에 맞는 시험 답안 종이를 마련하기 위해 애쓰는가 하면, 시험장의 좋은 자리를 다투기도 한다. 당시에도 과거 시험 부정이 극성이었다. 왕이 일부 고사장의 합격자를 무효 처리하고 직접 시험 감독하기도 한다.

그밖에 서원을 세울 때마다 불려가서 노역에 동원돼야 했던 승려들, 공사일을 하러 왔다가 월급을 못 받아 감독관과 싸운 목수, 양반이 노비의 제사나 첩의 삼년상을 치러주는 모습, 손자가 학문을 게을리하자 매를 들었다는 이야기, 말 도둑을 잡으려다 살인사건으로 비화되는 형사사건의 전말도 나온다. 동네를 능멸한 자는 동네 구성원 자격을 박탈하는 대목도 있다.

어려운 용어는 하이퍼링크된 사전으로 이해를 돕는다. 가령 왕이 피란을 나서며 입은 '융복'을 클릭하면 '가죽으로 된 전투복'이라고 나온다. 멀티미디어 자료도 이해를 돕는다. 임진왜란 때 선조의 피란 경로를 그래픽으로 보여주거나 조선시대 상례 절차를 플래시 애니메이션으로 보여준다.

시연회 참가자들은 민간 일기 자료가 스토리텔링에 맞춤하다고 말했다. KBS '역사스페셜'의 책임 프로듀서인 장영주 CP는 "일기류는 정치사에 비해 주목도 적게 받고 연구도 적은 생활사를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면서 "실록이나 중요 관변 사료에서 볼 수 없는 개인의 신변잡기와 통과의례 등 일반인이 관심 가질 만한 이야기가 풍부하다"고 했다.

김병일 원장은 "예부터 우리나라 고문헌의 절반이 영남에 있고 영남 문서의 절반이 안동에 있다고 할 정도로 이 지역에는 문집 생산량이 많고 전수가 잘 됐다. 최대의 창작 인프라를 구축해 우리 이야기에 기반을 둔 세계적인 스토리 한류의 전진 기지로 키워나갈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