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6 간첩 혐의 사건

‘386 운동권 출신 간첩 사건’을 파헤치고 있는 국가정보원이 온갖 설과 억측에 휩싸여 있다. 간첩단 수사와 맞물려 단행된 국정원장 교체 인사를 둘러싸고 ‘외압설’과 국정원 내부 ‘알력설’ 등이 무성하다. 과연 국정원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 김승규 국정원장

김승규 국정원장은 2005년 7월 11일 취임 이후 “왜 국정원이 할 일을 하지 않느냐”고 ‘성과’를 강조하며 국정원 직원들에게 일을 독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 대공수사국은 김 원장의 ‘해야 할 일’에 대한 주문을 ‘간첩 검거’로 받아들여 분위기가 고무됐다. 2000년 이후 검거 간첩은 6명에 불과했다. 2000년 6·15 정상회담을 계기로 ‘간첩 운운’은 세상 물정 모르는 짓으로 치부됐고, 대공수사국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왜 간첩을 잡지 않느냐”는 김 원장의 닦달과 독려는 대공수사국에 큰 힘이 됐다. 386 운동권 출신 간첩 혐의자에 대한 본격 내사가 착수된 것도 김 원장 취임 무렵으로 알려졌다.

그럼 1년 넘게 내·수사가 진행된 이번 간첩 사건이 하필 김 원장의 사의 표명 이틀 전에 터졌을까. 국정원은 10월 24일 사립S대 중퇴자로 ‘일심회’ 총책인 장민호(44)씨와 학원 사업가 손정목(42)씨, 민주노동당 전 중앙위원 이정훈(43)씨 등 2명의 조직원을 검거했다. 국정원과 검찰은 이 세 명에 대해 지난 10월 25일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국정원과 검찰의 철저한 보안 속에 이뤄졌던 영장청구 사실이 10월 26일자 조선일보에 ‘386 운동권 출신 3명 간첩 혐의 조사’라는 내용으로 보도되면서 ‘운동권 출신 간첩 사건’은 ‘이슈’로 부각됐다. 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된 10월 26일 오후 김승규 원장은 안보정책조정회의 참석차 청와대에 들어갔다가 예정에 없던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사의를 표명했다.

이 같은 순차적 정황 때문에 김 원장이 물러날 것을 예상하고 후임자가 누가 오든 간에 간첩 사건 수사를 하지 않을 수 없도록 서둘러 영장을 청구했다는 얘기가 나왔다. 일종의 ‘쐐기 박기’였다는 것이다. 간첩 사건을 둘러싼 국정원 내부의 견해차와 알력이 있었던 정황이 알려지면서 이는 상당히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졌다.

국정원 관계자들은 “구속영장 청구 시점을 놓고 김 원장과 일부 고위 간부들 간에 견해차와 논란이 있었다”고 전했다. 일부 고위 간부들이 ‘신중론’을 주장했지만 김 원장은 ‘속전’으로 밀어붙였다고 한다. 김 원장은 한 달 동안 수사 경과를 보고 받으면서 ‘간첩 혐의(조직구성+국가기밀누설)’가 확실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간첩 한 사람을 더 잡는 것보다 북한 핵실험 이후 국내 핵심 정보의 북한 유출 차단이 시급하고 더 중요하다는 게 김 원장 생각이었다”고 국정원 관계자는 말했다.

현 정권 핵심에 있는 부산 출신 인사 및 대북 온건론자인 이종석 통일부 장관과 ‘코드’를 맞춰 온 김만복 국정원 1차장(신임 국정원장 내정자) 등이 간첩 사건 수사의 ‘신중론’을 대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국정원이 ‘간첩’ 잡는 일을 해야 한다는 소신과,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보수적 안보관을 갖고 있던 김 원장으로서는 대북 포용정책을 주도한 외교 안보라인과 ‘코드’가 엇갈릴 수밖에 없었다.

김 원장은 북한 핵 실험 이후 포용정책 재검토 쪽 입장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종석 맨’으로 포용정책에 기울어있던 김만복 차장과의 정책적 갈등도 예상된 결과였다. 더욱이 김 원장은 국정원의 안정적 관리 차원에서 기용돼 정치적 배경이 없는 반면, 김만복 1차장과 이상업 2차장은 부산 출신으로 권력핵심의 부산파 또는 정치권 실세의 든든한 지원을 받아왔다.

국정원 소식통은 정책적 갈등 외에도 호남 출신인 김 원장과 이들 간부 간에 ‘지역적 갈등’의 골이 깊었다고 말한다. 원장과 간첩 사건 수사 ‘신중론’ 쪽이던 이들 고위 간부 간 ‘갈등’으로 인해 김 원장이 직접 간첩 사건을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 김 원장이 설익은 단계에서 ‘간첩 몰이’를 했다는 비난이 나오는 것도 이런 ‘내부 갈등’과 무관하지 않다는 게 국정원 관계자의 얘기다. 김 원장은 국정원장 교체설이 나도는 시점에 ‘건강 이상설’과 ‘대북 정보관리 무능설’이 퍼진 배경에 대해서도 내부를 진원지로 지목하는 듯했다.

간첩 사건이 보도된 이후 ‘사퇴 압력설’의 진위 공방도 불거졌다. 김 원장 사의 표명이 알려진 직후 청와대와 국정원은 “대통령의 외교안보 라인 진영 개편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사의를 표명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하지만 간첩 사건이 언론에 보도된 직후 사의 표명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청와대 일부 참모진이 간첩 사건의 파장을 의식, 김 원장의 사퇴를 밀어붙인 것 아니냐는 ‘압력설’이 제기됐다. 이에 윤태영 청와대 대변인은 “터무니없는 소설 같은 얘기”라고 발끈했다.

사그라들 듯하던 ‘압력설’은 김 원장의 조선일보와의 인터뷰를 계기로 증폭됐다. “사퇴 배경에 정치권 386들의 압력설 얘기가 있다”는 물음에 “개의치 않는다”고 인정하는 듯 모호한 답변을 해 정치 쟁점으로까지 번진 것이다. 그러자 청와대 관계자와 여권에서는 “업무 수행 능력에 의문이 적지 않았다” “북핵 상황 판단에 문제가 있었다” “조직 기강이 해이해졌다”는 등 김 원장 ‘흠집내기성’ 발언들이 쏟아져 나왔다.

‘내부 갈등설’을 근거로 김 원장 쪽에서 ‘압력설’을 흘린 것으로 몰고 가는 시각도 제기됐다. “김 원장이 수사국의 신중론을 묵살하고 간첩 혐의자의 구속영장 청구 등 강경몰이를 주도했다”거나 “국정원이 김 원장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교체설이 나도는 시점에 특정 언론(조선일보)에 수사정보를 흘렸다”는 확인되지 않은 얘기들도 여권 인사들을 통해 흘러나왔다. 간첩 사건의 경우 통상 기소 단계에서 공개되는데, 구속영장 청구 단계에서 공개된 배경에 김 원장이 있다는 ‘음모론’인 것이다. ‘사퇴 압력설’과 ‘음모론’이 맞선 셈이다.

이번 사건은 민주노동당 당원이 연루돼 있어 민노당과 진보 인터넷 매체가 먼저 검거 사실을 공개했다. 국정원 관계자는 “음모론은 터무니없다”며 “오히려 민노당이 그렇게 빨리 자기들 당원이 간첩 혐의로 체포된 사실을 공개할지 몰랐다”고 말했다.

김만복 국정원 1차장은 원장 내정 소식이 전해진 11월 1일 김 원장을 찾았다. 김 내정자는 이 자리에서 “이번 사건의 시작은 원장님이 했지만, 매듭 짓는 일은 저의 책임”이라며 “국정원과 개인의 명예를 걸고 수사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권력 핵심 인사들과 ‘코드’를 맞춰 온 김 차장이 발탁될 경우 간첩 사건 수사가 차질을 빚을 우려가 있다는 외부의 의구심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인사 청문회에서 간첩 사건 수사가 최대 쟁점으로 부각될 가능성이 있는 만큼 한나라당 등 야당의 부정적 시각을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포석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원장에게 굳이 이런 다짐을 한 자체가 간첩 사건 수사에 대한 그 동안의 소극적 입장을 방증하는 것이라는 게 국정원 안팎의 시각이다. 당장 김 원장의 측근은 “실천 의지가 담겨 있는지는 향후 행보를 봐야 알 것”이라고 말했다.

간첩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는 장민호씨 등 5명에 대한 국정원의 수사는 11월 12일을 전후해 검찰로 넘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김 내정자의 인사청문회 통과까지는 한 달 가량의 시간이 필요해 형식상 간첩 사건 수사 책임은 현 김승규 원장이 지게 된다. 하지만 정보와 권력의 무게 추는 이미 김 내정자에게 넘어갔다. 향후 간첩 사건 수사의 의미가 희석되거나 확대되기보다는 축소 쪽으로 방향을 선회할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