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수욕장 바위에 다닥다닥 붙은 조개.

뉘엿뉘엿 하루해가 지면서 어둠이 드리우는 해거름 녘에, 너울거리는 바다를 멍하니 보고 있노라면 더없이 고적(孤寂)해진다. 채집에 찌든 탓이다. 까막까치도 집을 찾는 이 시간이 유독 힘들다. 그런데 그때 저 멀리 바닷가에 드러누워 찰랑거리는 꼬마 배 한 척이 길손의 눈앞에 남다르게 다가온다! 지독한 놈들이다! 세상에, 조개가 나무를 뚫고 그보다 더한 바윗돌에도 구멍을 낸다니. 개(패류학자) 눈에는 똥(조개)만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고 했겠다.

터벅터벅 걸어서 아까 봤던 그 배 가까이로 다가간다. 생물이 살지 않는 곳이 없다! 어디 살 데가 없어 짠물에 담겨있는 배 바닥을 파고들어가 산단 말인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가끔 가다가 고깃배를 뭍으로 끌어올려 배 바닥을 불로 그을리거나 페인트칠을 하는 것은 따개비나 담치를 죽이고 또 이런 조개들의 파고듦을 막자고 그런다. 나무에 틀어박혀 사는 조개에는 ‘나무속살이조개’ 무리가 있다. 서양 사람들은 이것들을 ‘ship worm’이라 하니 말 그대로 ‘배 벌레’다.

이들 조개(껍데기가 둘임)는 모두 해산(海産)으로 세계적으로 65종이 넘고 우리나라에만도 4종이 서식한다. 조개껍데기에는 톱날 같은 예리한 돌기가 많이 나있어서 이것으로 나무를 문질러 구멍을 낸다. 1분에 8~12번 나무를 갉아낸다. 그리고 파낸 자리에는 야문 석회성분을 분비하여 하얀 관을 만들고 거기에 몸을 집어 넣는다. 1818년 프랑스 해군(군무원)인 브루넬(Brunel)은 나무속살이조개가 나무에 굴을 파고들면서 나무 가루(톱밥)를 뒤로 밀어내는 행태(行態)를 관찰한다. 이때만 해도 아직 땅굴 파는 기계가 없었다.

흙을 파내는 땅굴기계는 나무속살이조개를 흉내 내어 이렇게 하여 탄생한다. 모든 발명은 자연을 모방한 것이요,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다. 그 작은 생물의 행동을 예사로 보지 않았기에 굴착기를 만들 수 있었다. 여태까지 한 이야기는 다음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바다에도 돌을 쪼고 다듬는 석공(石工)이 있다. 석공도 좋고 석수(石手)라 해도 좋다. 그것이 다름 아닌 ‘돌속살이조개’. 돌 속에서 살면서 한살이를 보내는 조개다.

바위 틈새가 아닌 돌의 본체, 성성한 돌을 쑤셔 파고들어가 산다니! 1㎝가 못 되는 것에서 2㎝가 넘는 것도 있으며 우리나라에도 10종 넘게 남·동해에 서식한다. 이것들은 대부분 조간대(바닷물이 들락거리는 곳)에 살며 물렁한 축에 드는 석회암, 사암(모래가 굳어진 바위), 이암(진흙바위)을 파고든다. 이것들은 나무속살이조개보다 더 센 무기가 있다. 두 껍데기의 끝 부위에 예리한 조각칼(drill), 즉 끌이 붙어있어 이것을 돌에 대고 아등바등 문질러 구멍을 뚫는다.

바위가 뻐끔뻐끔 곰보를 닮았다. 조개껍데기가 돌보다 세고 바위보다 강하다!? 얼마나 생물들의 생존력이 강하고 다양한가를 되씹어보게 된다. 바위 안에 집을 튼 이것들은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오지 못한다. 죽을 때까지 거기에, 아니 죽어서도 그 속에 머물 수밖에 없다. 무슨 놈의 운명, 아니 숙명이 저 먼 바닷가 암혈(바위굴) 속에 푹 박혀 평생을 보낸단 말인가. 지금도 바닷물이 출렁거리는 거기 돌 속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조개, 이름 하여 돌속살이조개! 아무리 만물이 제자리가 있다(萬物皆有位)고 하지만…. 만경창파(萬頃蒼波), 아, 그리운 바다의 물결 소리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