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현지 시각) 저녁 잉글랜드와 프랑스 축구 대표팀 친선 경기가 열린 런던 웸블리 경기장. 영국의 축구 성지(聖地)로 불리는 이 경기장의 대형 스크린에 프랑스어로 적힌 '자유·평등·박애'라는 세 단어가 반짝거렸다. 경기장 위로 솟은 대형 아치형 조형물은 프랑스 국기를 상징하는 빨강·파랑·흰색 조명을 받았다.
7만 관중이 경기장을 가득 채운 가운데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와 윌리엄 왕세손이 그라운드에 모습을 나타냈다. 두 사람은 물론 모든 관중이 기립해 프랑스 국가(國歌) '라 마르세예즈'를 합창했다. 파리 테러 희생자를 애도하는 의미였다. 검은색 밴드를 팔뚝에 찬 양팀 선수들도 그라운드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함께 국가를 불렀다. 광기 어린 테러에 결코 굴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우렁찬 노랫소리로 울려 퍼졌다.
역사적으로 반목의 세월을 보내기도 했던 양국이 극단 무장세력에 맞서 '영불(英佛) 연대'를 공고히 하는 상징적 순간이기도 했다. 일간지 가디언은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원정팀의 국가가 이보다 더 크고 우렁차게 울려 퍼진 적은 없었다"고 했다. 양팀 모든 선수는 주심의 경기 시작 휘슬이 울리기 전 센터 서클에 모여 1분간 묵념했다. 90분 승부는 2대0으로 잉글랜드가 승리했지만 '양팀 모두 승자'라는 글이 SNS에 쏟아졌다.
최근 며칠 사이 이번 경기를 취소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컸다. 테러범들이 프랑스 축구를 상징하는 '스타드 드 프랑스' 경기장을 노렸듯 영국 축구의 심장인 웸블리 경기장도 위험하다는 지적이었다. 게다가 이슬람국가(IS)는 파리 테러 이후 "다음 목표가 런던"이라고 공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국 정부와 잉글랜드축구협회는 고심 끝에 예정대로 경기를 치르기로 했다. 캐머런 총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우리 모두의 일상을 지키는 게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영국의 축구팬들도 테러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잉글랜드축구협회는 파리 테러 소식이 전해진 뒤 "이미 입장권을 구입한 팬들이 원한다면 환불해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의외로 입장권을 사서 경기를 보러 오겠다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 입장권 판매 속도가 더 빨라졌다. 로이 호지슨 잉글랜드 감독은 "선수들과 많은 관중이 함께 모여 테러리스트들이 세상을 이길 수 없다는 걸 보여줬다"고 했다. 영국 일간지 더타임스는 "스포츠 이벤트라기보다 외교적인 행사에 가까웠다"고 평가했다.
이날 경기를 앞두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웸블리 경기장 안팎에는 경찰이 대거 배치됐다. 경기 내내 경비용 헬리콥터가 웸블리 경기장 주변을 돌면서 수상한 낌새가 없는지 공중에서 감시했다. 관중들은 경기장에 입장하기에 앞서 까다로운 몸수색을 받았지만 불평하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고 영국 언론은 보도했다.
물론 유럽에서 대형 스포츠 경기를 둘러싼 테러 공포가 완전히 불식된 것은 아니다. 같은 날 독일 하노버 HDI 경기장에서 열릴 예정이던 독일과 네덜란드 축구 대표팀 친선경기는 취소됐다. 경기 시작 1시간 30분 전 HDI 경기장에 폭탄을 터뜨리겠다는 협박이 있었기 때문이다. 입장했던 관중들은 모두 빠져나갔다. 수색견 등을 동원해 경찰이 경기장 안팎을 샅샅이 뒤졌지만 이상 징후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 경기에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참석해 캐머런 총리처럼 테러에 굴복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