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방문 중인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일본 총리의 모습은 역사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무라야마 전 총리는 지난 11일 국회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났다. 일본 총리 출신으로는 처음이었다. 그는 어린 소녀들이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가는 모습을 담은 그림을 보고선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선 다른 일본 정치인들에게서는 찾기 힘든 마음이 느껴진다.

그가 만난 위안부 할머니 중에는 무라야마와 1924년생 동갑인 박옥선 할머니도 있었다. 박 할머니는 1941년 공장에서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아 만주로 끌려가 일본군위안부 생활을 했다. '사람들 손가락질이 두려워' 귀국하지도 못하다 2007년에야 경남 밀양 고향 마을로 돌아가 66년 만에 여동생을 만날 수 있었다. 무라야마는 12일 국회에서 "우리는 여성의 존엄을 빼앗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것"이라며 "이상한 망언을 하는 사람이 많은데 정말 부끄럽다"고 했다.

무라야마는 총리 시절이던 1995년 8월 15일 "일본은 식민 지배와 침략으로 아시아 제국에 많은 손해와 고통을 줬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일본 정부의 공식 담화 중 가장 적극적인 사과를 담았다. 그는 12일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지 않는 (일본) 각료는 물러나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일본에서 벌어지는 현실은 무라야마 담화와는 정반대다. 무라야마와 같은 사람은 소수로 위축됐고 그를 '매국노(賣國奴)'라고 비난하는 극단 세력이 득세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입으로는 '무라야마 담화 계승'을 말하고 있지만 몸은 야스쿠니 신사의 A급 전범(戰犯)들 앞에 머리를 숙였다. 이런 아베 노선은 60% 안팎의 여론 지지를 받고 있다. 일본 서점가엔 한국과 중국을 증오하는 책과 만화, 주간지들이 널려 있다.

지난 9일 치러진 일본 도쿄도(都)지사 선거에서는 다모가미 도시오(田母神俊雄)라는 극단주의자가 젊은 층에서 높은 득표율을 얻는 파란을 일으켰다. 항공자위대 막료장(공군 참모총장) 출신인 다모가미는 1930~40년대 동아시아를 전쟁의 소용돌이에 몰아넣은 일본 군국주의자들을 드러내놓고 추앙하는 인물이다. 조선 침략은 조약(條約)에 따른 것이고, 창씨 개명이나 위안부 강제 동원 같은 것은 있지도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런 그가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일본 20대 젊은이들로부터 24% 지지를 받았다. 60대(지지율 7%), 70대(6%)보다 젊은 층의 지지가 훨씬 높았다. 지금 일본의 20대는 1990년대 후반에 시작된 왜곡 교과서 집필 운동의 영향을 받고 자란 첫 세대다. 앞으로 20대 이하는 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외면하고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쓰인 교과서로 교육을 받게 된다. 한·일 갈등은 미래 세대(世代)에 더 격화될 수도 있다. 당장의 한·일 충돌보다 더 심각한 문제다.

[사설] "증거·자료 갖고 起訴하라"는 검찰총장의 자아비판
[사설] 통신사들, 보조금 뿌리는 걸 보니 휴대폰 요금 크게 내려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