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5일 배를 타고 서해로 떠내려온 북한 주민 31명 중 4명이 귀순 의사를 밝히자 북한이 7일 남북 적십자 실무접촉을 제의하면서 "9일 판문점에 4명의 가족과 함께 나올 테니 남측도 귀순 당사자 4명을 데리고 오라"고 요구했다. 정부는 적십자 접촉은 응할 수 있지만 귀순자 4명을 가족과 대질시키진 않겠다는 방침이다.
북이 '가족 대질' 카드를 꺼낸 건 귀순자 가족을 인질로 삼아 귀순자들의 결심을 뒤집어 보겠다는 계산일 것이다. 귀순자 4명은 귀순 결심을 내리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남쪽에 남을 경우 북에 놔두고 온 피붙이들이 반역자라는 딱지를 이마에 붙이고 겪을 고초를 머리에 그리며 며칠 밤을 설쳤을 것이다. 이런 귀순자들 앞에 북의 가족들을 데려오겠다는 것은 '귀순 의사를 되돌리지 않으면 여기 있는 네 가족들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이자 고문(拷問)이다.
세계적으로 한 해 37만여명이 망명을 신청한다. 그러나 망명의사를 확인하기 위해 그들 가족과의 대질을 요구한 사례는 없다. 이념과 체제는 제각각이어도 인간이 넘어서는 안 될 선(線)이 있는 법이다. 자식과 아내의 머리에 총구를 들이대고 '당신의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방아쇠를 당기겠다'고 하는 것은 인질범의 수법이다. 인질범을 흉내내는 것은 국가가 아니라 범죄집단이다. 소말리아 해적들은 납치한 선박회사나 그 정부가 몸값 흥정에 응하지 않으면 피랍 선원들을 협박해 가족에게 전화를 걸게 해 "몸값을 내지 않으면 나는 죽는다"고 말하게 만든다. 지금 북한이 꼭 그렇다.
북은 남쪽으로 온 탈북자 규모가 2만명을 넘어서고 반김(反金) 운동이 조직화되는 움직임을 보이자, 탈북자 가족들 신변에 위협을 가하며 남쪽에 그 소식이 전해지도록 하는 방식으로 탈북자 활동에 족쇄를 채우려 하고 있다. 북한은 이제 국가라는 가면(假面)까지 벗어던진 채 짐승의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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