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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정보
조선일보 A18면
출처
조선일보
ID
SWGWA3MHDRFNZNVHWEWNH2HJQI

모두 기피하던 동네 찾게 만든 책방 "맷집 키우며 버틴 보람"

전주=황지윤 기자
입력 2025.04.15 00:51

[우리 동네 이런 서점] [12] 전주 서노송동 물결서사

“가진 건 없지만 이야기가 있어요.” 전북 전주 서노송동에서 책방 ‘물결서사’를 운영하는 임주아(37) 시인이 말했다. 이 책방에서 지난해 김영하·김애란 작가가 사인회를 했고, 최근엔 오은·안희연 시인, 정용준·최진영 소설가가 북토크를 위해 들렀다. 문인들은 어떤 이야기에 끌려 이곳에 오는 걸까.
책방 안에서 작은 유리창을 통해 바깥을 바라본 모습. 책방 대표 임주아 시인이 포즈를 취했다. /김영근 기자

평일 오후 2시 전주 구도심 서노송동은 한산했다. ‘임대’라고 적은 종이가 나붙은 빈 상가 수십 곳을 지났다. 건물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 미닫이문에 붙은 ‘미성년자 출입 금지’ 스티커. 이곳이 한때 ‘유리방’이라는 성매매 업소였음을 알 수 있었다. 사람은 간데없고 길고양이만 빈 건물에 터를 잡았다. 꼬불꼬불한 골목을 따라 걷자 이 동네에서 드물게 인적이 느껴지는 공간이 나타났다. 2018년 12월 영업을 시작한 책방 ‘물결서사’다.
1950년대 옛 전주역(현 전주시청 자리)을 끼고 성매매 업소가 모인 ‘선미촌’이 형성됐다. 한때 200여 업소가 성업했다고 한다. 2004년 성매매방지특별법 시행 후 규모는 줄었지만, 업소 수십 곳이 여전히 불을 밝혔다. 2014년 전주시가 ‘서노송예술촌 문화 재생 사업’으로 성매매 업소를 사들이고 이를 문화 예술 공간으로 바꾸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물결서사’는 전주시가 네 번째로 매입한 건물에 들어섰다. 여인숙으로 운영되다가 창고로 방치되던 곳이다.
전주 구도심 서노송동 일대 모습. /김영근 기자

동네의 옛 지명은 물왕멀. 물이 좋은 마을이란 뜻이다. 거기서 ‘물결’이란 말을 떠올렸다. 초창기에는 예술가들의 아지트 겸 커뮤니티 성격이 강했다. 시(市) 주도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 사진·미술·음악·문학 등 각 분야 30~40대 예술가 7명이 모였다. 서점 매니저 경력이 있는 임 시인이 책방 대표를 맡게 됐다. 왜 책방이었을까? “책방은 책만 파는 공간이 아니거든요. 아주 유연한 공간이에요. 전시·공연도 할 수 있고, 책 큐레이션으로 메시지를 전할 수도 있고요.”
그는 선미촌에 처음 발을 들인 기억을 꺼냈다. 2017년 시가 매입한 3호점, 4층짜리 옛 성매매 업소에서 열린 전시였다. 그는 “내가 시를 쓴다면서 세상의 이런 면도 모르고 살았나 하는 자책이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현장에서 마주한 ‘가장 아픈 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 핀다’는 문구엔 갸웃했다. “이 동네를 ‘가장 아픈 곳’이라고 섣불리 규정하고 연민하는 것이 맞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어요. 아픔이나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어요.”
임 시인은 자신을 “로컬 크리에이터”라고 칭했다. 사인회·북토크 등 행사 홍보에 열을 올린다. “인스타그램 ‘릴스’ 영상 엄청 찍어서 ‘여기 가면 홍보 잘해준다’는 생각이 들게끔 합니다.” 지방의 작은 서점을 유명 문인들이 연이어 찾는 이유가 있다. /김영근 기자

책이 진열된 ‘물결서사’ 1층 공간. /김영근 기자

여성 단체에서 주도하는 두 번째 전시에 참여하려 했지만 “‘구멍’이나 ‘꽃잎’ 같은 단어를 쓰지 말라”는 지시에 전시 보이콧을 하고 나왔다. 그는 “이제는 그 맥락을 알지만 당시엔 여성 단체에 종속되지 않은 독자적인 길을 가야 한다는 생각이었다”고 했다. 선미촌에서 매일 문을 열고 상업 활동을 하면서 동네를 알아가기로 했다. 이후 ‘물결서사’ 2기 멤버로 비보이·극작가 등이 합류했으나, 차츰 참여 인원이 줄었다.
마지막 남은 성매매 업소가 문을 닫자 2022년 초 전주시는 ‘선미촌 제로화’를 선언했다. 2023년부터는 임 시인 홀로 책방을 지킨다. 주변에선 ‘이제 그만 나와라’ 말하지만 “이곳(선미촌)만의 이야기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임 시인을 놓아주지 않고 있다. 그는 “선미촌에 관한 책을 내기 위해 소화하는 시간이 필요했는데, 이젠 쓸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책방 '물결서사'에 다녀간 작가들의 친필 사인본을 판매하고 있다. /김영근 기자

책방 홍보는 다방면으로 한다. 임 시인은 “창의성을 발휘하지 않으면 책방은 살아남을 수 없다”고 했다. 매주 화요일 아침 7시에 시작하는 지역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6년째 책 추천을 하고, 올해로 3회를 맞은 독립 출판 북페어 ‘전주책쾌’(6월 7~8일) 기획자로 참여한다. 북토크에도 공을 들인다. 주인이 시인임을 알고 오는 손님들은 ‘시집 추천을 해달라’며 먼저 말을 건넨다. “그러면 너무 신이 나죠. 시집 세 권 정도 꺼내서 같이 봐요.”
서점의 독특한 서사는 전국에서 사람을 끌어모은다. 주말 오후엔 짐 가방을 끌고 오는 타지 손님도 많다. 전주역까지 차로 15분 거리라 관광객들이 여행 마지막 코스로 서점을 찾는 것. 공간의 특수성 때문인지 여성주의 서적이 잘 팔리는 것도 특징. 이날 매대엔 우리나라 최초 여성 근대소설가 김명순(1896~1951)의 에세이 ‘사랑은 무한대이외다’(핀드), 한국 현대사에서 여성 자영업자를 조명한 ‘여사장의 탄생’(마음산책) 등이 놓여 있었다.
“장사가 되느냐”는 질문에 그는 “멸종 직전 하루 책살이”라고 답했지만 “10년은 채우고 싶다”고 했다. 임 시인은 지난겨울 ‘문장웹진’에 발표한 시 ‘망뭉망’에 이렇게 썼다. ‘망가지고 뭉개져도 망하지 않는/ 맷집// 맷집도 집이다’. “누구나 기피하는 동네가 누구나 찾아올 수 있는 동네가 되었다는 것이 제가 맷집을 키워 온 보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인적이 드문 전주 서노송동에 위치한 책방 '물결서사'. 길고양이들이 이 일대 빈 상가에 터를 잡고 골목골목을 도도하게 누빈다. /김영근 기자


[물결서사의 PICK!]
●자주 추천하는 책은 사회과학서 ‘레이디 크레딧’(현실문화). 금융화를 통해 거대 산업으로 변모한 오늘날 한국의 성매매 산업을 분석한다.
●서점 방문 전후로 서노송동 일대를 천천히 걸어보라고 한다. ‘선미촌’의 역사를 가늠해볼 수 있다.
●혼자 방문하기 좋은 책방. 1인 손님은 책을 구매하면 2층 다락 공간을 무료로 2시간 동안 쓸 수 있다. 기차 시간이 어중간하게 남았을 때 머물기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