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25.04.02 10:27
SK그룹이 고(故) 최종현 선대회장의 경영 활동 일체가 담긴 13만여건의 기록을 디지털화한 이른바 ‘선경실록‘을 만들었다고 2일 밝혔다. SK라는 한 기업의 역사를 넘어 근현대 경제사를 연구하는 중요 사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SK가 그룹 수장고에 보관돼 있던 문서·사진, 테이프 등 13만1647점을 복원한 결과다. SK 관계자는 “음성 녹취 테이프만 3530개로, 하루 8시간 연속해서 들어도 1년 넘게 걸리는 방대한 분량”이라고 했다.
여기에는 최 선대회장이 임직원들과 가진 각종 회의, 그룹의 중요한 의사결정 순간에 벌인 토론과 판단, 그룹 총수들간의 가벼운 대화 등 생생한 육성 녹음이 담겼다.
일례로 정치 상황이 불안했던 1980년대 중반, 최 선대회장은 선경 임원·부장 신년 간담회에서 “상당수 사람이 ‘최근 정치 불안이 커서 경제 큰일 나는 거 아니에요?‘라고 한다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우리는 가장 리얼리티를 걷는 기업가들이니까 불안 요소 때문에 괜히 우리(기업인)까지 들뜰 필요는 없다고. 우리가 ‘정치가 불안할수록 경제까지 망가지면 안된다‘는 사명감을 가져야 경제가 나빠지지 않는거야”라고 했다.
또 1982년 신입사원들과 대화에선 “땅덩어리가 넓은 미국에서도 인재라면 외국 사람도 쓰는 마당에 한국이라는 좁은 땅덩어리에 지연, 학연, 파벌을 형성하면 안된다”며, 한국의 ‘관계지상주의‘를 깨자고 강조했다.
최 선대회장은 1992년 임원 간담회에선 “R&D(연구개발) 투자해서 (기술 개발) 성공했는데 돈은 안 벌린다. 그러면 R&D 예산이 깎인다”며 “R&D 직원도 시장 관리부터 마케팅까지 해봐야 비로소 이제 돈이 모이는 걸 알고 연구도 더 열심히 하고, 성공도 시킬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같은 해 SKC 임원들과 회의에서는 “플로피디스크를 팔면 1달러지만, 그 위에 소프트를 얹으면 한 20배가 된다. 하드웨어는 20%, 80%는 소프트로 가야된다”며 하드웨어의 성장 한계와 소프트웨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번 복원 자료에는 SK의 성장 과정도 담겨 있다. 세계경제 위기를 몰고 온 1970년대 1·2차 석유파동 당시 정부의 요청에 따라 최 선대회장이 중동의 고위 관계자를 만나 석유 공급에 대한 담판을 짓는 내용, 1992년 이동통신사업권을 반납할 때 좌절하는 구성원들을 격려하는 상황 등이 기록돼 있다.
이 밖에도 타 그룹 총수들과 산업 시찰에서 나눈 대화, 외국 담배회사가 한국 내 유통 협업을 제안하자 ‘돈은 틀림없이 되겠지만, 기업 문화와 맞지 않는다‘며 거절한 일화, 김장김치 보관법까지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가 담겼다.
SK는 “최 선대회장의 디지털 자료를 그룹 고유 경영 철학인 SKMS와 수펙스(SUPEX·인간 능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수준) 추구 문화 확산 등을 위해 활용할 방침”이라며 “우선 내부용으로 활용하면서 외부 공개 여부도 검토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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