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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정보
조선일보 A31면
출처
조선일보
ID
UL3WE5E7JNAOPHIXCHFWOWSTD4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575] 불타지 않는 박물관

우정아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
입력 2025.03.31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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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
게티 빌라 박물관, 1954년 설립, 1974년 개관, 2006년 재개관, 미국 캘리포니아 퍼시픽 팰리세이즈 소재.

게티 빌라는 1954년, 미국 석유 재벌이자 미술 컬렉터 J 폴 게티(Jean Paul Getty·1892~1976)의 캘리포니아주 퍼시픽 팰리세이즈 소재 자택에서 시작된 박물관이다. 게티는 세계 최고 부자로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로 돈이 많았지만 악명 높은 구두쇠였다. 박물관 임원이 허락 없이 자동 연필깎이를 구입했다고 호통을 치고, 심지어 손자의 납치범과 벼랑 끝 흥정을 벌여 몸값을 깎을 정도였다. 그래도 미술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1974년 완공된 게티 빌라는 수집품이 늘어나 자택마저 비좁아지자, 인접한 대지를 매입해 신축한 건물이다. 그 원형은 로마 황제 카이사르의 장인 소유였던 ‘빌라 데이 파피리’의 저택과 정원이다. 현재 게티 빌라는 기원전 6500년에서 기원후 400년 사이에 만들어진 고대 그리스, 로마, 에트루리아 문명의 유물 4만40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올해 1월 LA 지역을 휩쓴 초대형 산불에서 가장 큰 피해를 당한 곳이 바로 퍼시픽 팰리세이즈다. 그 한가운데 있던 게티 빌라는 지을 때부터 ‘예술 수준의 방재 시스템’으로 유명했지만, 화마(火魔)가 예술을 알아보고 피해가지는 않았다. 난폭한 불길은 아니나 다를까 박물관 경내로 들어왔다. 하지만 내화 콘크리트, 이중 벽체, 외부로부터의 연기 유입을 막는 양압(陽壓) 공조, 정원에 쉬지 않고 물을 댄 스프링클러, 촘촘하게 경내를 감시하는 카메라에 막혀 발화 6분 만에 진압됐고 추가 피해는 없었다.
그 뒤에는 한 달간 지속된 화재 기간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박물관에 상주했던 직원들이 있었다. 방재 시스템을 완벽하게 만들어 주는 건 사람의 헌신이다. 그리고 시스템이 궁극적으로 지켜줘야 할 것은 바로 그 헌신하고 희생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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