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흔적 중국 조선족

잊혀진 흔적 중국 조선족

93년 10월 초, 아내 가슴에 안긴 생후6개월짜리 아들과 함께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시에 도착했다. 낯선 거리는 어둡고, 난방이 안 들어오는 차가운 방안에서 밖을 내려다보니 벌써 가루눈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그 때 나의 가슴은 솔직히 기대감보다 불안감으로 가득했다. 중국어 한마디 못하고, 그 곳 생활에 대해서도 아무 것도 모르고, 무엇보다 어린아이가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지가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아내는 대학에서 일본어를 가르치고, 나는 중국어를 배우고, 우리아이는 중국인 보모한테 이유식을 먹는 것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의 중국에서의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내는 일본인 이고, 우리는 결혼 후 서울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만 살면 우리 한쪽은 항상 불편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서로 실감하게 되었다. 우리는 어딘가 서로에게 대등해 질 수 있는 외국에서 생활해 볼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를 했다.

아내는 몇 년 전에 하얼빈에 유학 간 적이 있었다.어린아이를 데리고 중국에 가자고 했을 때, 우리가 그 목적지를 하얼빈으로 쉽게 결정한 것은 그 때 사귄 아내의 친구들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 들 도움 없이는 우리의 중국 생활이 실현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중국에서 지냈던 3년 동안, 나는 중국어 일상회화를 배우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우리 동포들의 항일 투쟁에 대해 배웠고, 가족의 소중함도 배웠다. 우리 아들은 걸음마를 배우고 오줌을 가리고 숟갈질을 배우고, 때로는 부모보다 더 정확한 발음으로 중국어를 말하기까지 했다.

... 가끔 나는 사진을 전공하지 않았으면 역사를 공부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우리 근대사에 대해 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간도지역에 있었던 우리민족의 항일 투쟁에 대해 나에게 가르쳐 주신분은 연변대학교에 계시는 박창욱 교수님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전혀 듣지 못했던 역사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나 충격적이었으며, 그런 역사의 증인들이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에 나는 너무나 흥분했다. 나는 밤마다 역사책을 보는 일에 몰두했 다. 학교앞에서 시내로 나가는 버스는 저녁7시가 되면 끈어지고 솔직히 밤에 할 일도 없었다. 아마 그 때 독서량은 그 동안 내 인생에서 읽었던 모든 책만큼이나 되었을 것이다. 그 전에는 사진 찍기 바빠서 책을 보는 시간이 아까웠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사진을 찍기 위 해 더 열심히 책을 보았다.

그때부터 나의 여행이 시작되었다.완행기차를 타고 시골역 에서 내려 주소를 적은 쪽지를 몇 번씩 확인하면서 길을 물었다.버스를 타고, 삼륜차 택시 를 타고, 때로는 당나귀가 끈는 리어카도 타고 어렵게 찾아간곳에, 만나고 싶은 사람이 없었을 때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이사 갔다는 동네 사람들 말을 의지하여 또 트럭을 탔다.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몇일 걸리기도 했고, 겨우 찾았던 사람이 중풍 때문에 몸이 불편해서 말도 못하고 예전 기억이 확실하지가 않았을 때도 많았다. 만약 내가 역사 학자이었다 면 이런일을 겪을 때마다 너무나 지치고 실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행히 사진가이다. 역사의 증언자가 말을 못해도 그분이 살아 있는 모습을 나의 카메라에 담을 수 있다는 것만 으로도 나는 만족할 수가 있었다.

...역사의 증언자들을 만나면서 내가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분단 국가의 비극이었다.이데 올로기의 차이 때문에 많은 투사가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죽은 자도 같은 우리민족이고 조 국독립이라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비극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김일성과 같이 혁명에 참여했던 사람은 일찍이 북한에 가서 후대를 받았으나,우리는 45년간 중국과 수교가 없었기 때문에 민족주의 계열의 투사 유가족을 오랫동안 외면한 채 돌보아 주지 못한 게 전해지지도 않았고, 문화혁명 때 홍위병에 들키는 것을 두려워한 유가족들이 귀중한 자료나 사진을 모두 불에 태워 없애고 말았다. 박해를 피하기 위해 수없이 이사를 다녔고, 심지어는 성씨까지 바꾼 유가족도 있었다. 분명히 항일을 했지만 자료나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보상을 못 받는 유가족도 지금까지 많고, 투사의 가족을 먹여 살린 친지들(특히 여자들)이 직 계가 아니라는 이유로 아무 보상도 못 받고 있다.

그리고 누구는 남한파, 누구는 북한파라 는 말이 지금도 계속 쓰이는 이데올로기의 차이가 낳은 상처는 치유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 아 있다. 지금도 나는 역사의 증인을 만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할 생각이다.

내가 돌아다녀야 하는 땅은 너무나 넓고, 거기에 드는 경비도 만만치가 않다. 가끔 나는 시간이 없다고 초초해진다.
내가 어렵게 사진에 모습을 담은 몇 분이 벌써 저 세상으로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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