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남의 시로 가꾸는 정원] [125] 장마 개인 날

조선일보
  • 장석남 시인·한양여대 교수
입력 2020.08.03 03:12

장석남의 시로 가꾸는 정원 일러스트

장마 개인 날

하늘이 해오리의 꿈처럼 푸르러
한 점 구름이 오늘 바다에 떨어지련만
마음에 안개 자옥히 피어오른다
너는 해바래기처럼 웃지 않어도 좋다
배고프지 나의 사람아
엎디어라 어서 무릎에 엎디어라

―이용악(1914~1971)

비의 대부대가 한반도 일대를 에워싸고 무시로 출몰합니다. 태연히 물러났다가도 일개 게릴라 부대는 기습적으로 비 폭탄을 퍼부어 산을 뭉개고 길을 삼킵니다. 자연의 일이니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닙니다만 공동체의 역사에서나 개인사에서도 그러한, 장마와 같은 일들이 마치 필연처럼 엄습합니다. 그리고 또 지나가 '장마 개인 날'이 있습니다.

이 시인에게 '장마'는 크게 '식민'으로서의 운명이기도 했겠으나 시대를 달리하면 '전쟁'과 '독재'와 '천안함' '세월호' 등등이 모두 장마의 다른 이름들입니다.

모처럼 씻은 듯이 새하얀 '해오리'가 '꿈처럼' 하늘에 떠 있고 바다는 푸르러 '한 점 구름'마저 선명히 비춥니다. 이렇게 좋은 날 가슴 저 아래 숨죽여 그리운 이가 있으니 이 '화창의 날'을 '안개'로 적시며 '자옥히 피어'오릅니다. 미어지는 가슴으로 독백합니다. '배고프지 나의 사람아/ 엎디어라 어서 무릎에 엎디어라'. '어서'! '무릎에 엎디어'진 어깨는 그 들썩임이 아주 급하게 높아질 겁니다. 그러나, 그러나 그것도 마음만의 일! 지금 눈앞은 텅 빈, 그리움만이 가득한 '장마 개인 날'일 뿐입니다. 독자는 거기 오그라진 가슴으로 오래 같이 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림자가 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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