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연 PD의 방송 이야기] 창작의 무게를 견뎌내라!

조선일보
  • 이수연 TV조선 시사제작부 PD
입력 2020.08.01 05:00 | 수정 2020.08.02 14:57

이수연 TV조선 시사제작부 PD
이수연 TV조선 시사제작부 PD
얼마 전 한 예능 프로그램이 구설에 올랐다. 일본 게임을 따라 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유명한 PD 작품이라 시끄러웠지만 관계자가 전혀 아니라고 부인하며 진정돼 가는 모양새다. 늘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해내야 하는 제작진으로서 다시 한번 창작의 무게를 느끼게 하는 표절 소동이었다.

작은 아이디어가 하나의 창작물로 완성되기까지 수많은 손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표절 상황이 벌어진다. 방송 작가의 꿈을 안고 교육원에 다닐 때 한 공중파 PD가 특강을 와서 "해외 입양아 특집 기획안을 써오라"는 과제를 내줬다. 우린 열심히 기획안을 써서 제출했다. 특강이 끝나고 얼마 후 그가 연출하는 방송에서 그 기획안들이 '입양아 특집'이란 타이틀을 달고 방송되는 걸 목격했다. "아이디어 좀 쓰겠다"고 한마디만 해줬어도 덜 섭섭했을 텐데, 작가 지망생들의 창작물이라고 너무 가볍게 본 건 아닌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눈뜨고 아이디어를 뺏기는 일은 현장에서도 되풀이됐다. 한 시상식에 작가로 참여했을 때 일이다. 시상식은 TV와 라디오로 이원 생중계됐는데 필자는 라디오 담당이었다. TV를 맡은 선배가 완성된 라디오 대본을 보더니 "두 대본이 너무 다르면 안 된다"는 이해할 수 없는 핑계를 대고 베껴 쓰기 시작했다. 선배 작가가 하는 일이라곤 라디오 DJ 멘트를 무대 위 MC들이 주고받는 멘트로 바꾸는 게 전부였다. 밤새 고민해서 쓴 원고를 몇십 분 만에 옮겨 적은 선배가 가뿐한 표정으로 퇴근하는 걸 보며 허탈했던 기억이 있다.

[이수연 PD의 방송 이야기] 창작의 무게를 견뎌내라!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인기 프로그램이 하나 뜨면 비슷한 방송이 우후죽순 생겨난다. 최근 '미스터트롯' 인기에 편승한 유사 프로그램이 봇물이 터지듯 말이다. 하지만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아이디어잖아?"라는 '편리한 생각'은 금물이다. 제작진 스스로 '창작의 권리'를 지키지 못한다면, 방송을 무단 도용의 정글로 만든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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