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마피아 보스, 아파트 계단서 시신으로...범인은?

입력 2020.07.31 15:48 | 수정 2020.07.31 20:41

3년 넘게 성폭행 등으로 세 딸 학대
계획 살인 혐의… 징역 20년형 위기

2018년 7월 27일, 러시아 모스크바의 한 아파트 계단에서 50대 남성의 시신이 발견됐다. 마피아 조직의 보스로 알려진 미하일 하타투리안(당시 57세)으로, 그의 가슴과 목에 수십 개의 자상(刺傷)이 나 있었다.

용의자로 붙잡힌 건 하타투리안의 세 딸인 크레스티나와 안젤리나, 마리아였다. 이들은 직접 경찰에 신고하고 범행을 자수했다.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수년간 성폭행과 신체적·정서적 학대를 받아왔다고 주장했다. 당시 각각 19, 18, 17세였다.

이 중 첫째와 둘째인 크레스티나, 안젤리나의 재판이 31일(현지 시각) 모스크바 법정에서 열린다. 사건 당시 미성년자였던 마리아는 별도로 재판과 정신과 치료를 병행하게 됐다.
가정 폭력을 일삼던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를 받고있는 세 자매. 왼쪽부터 크레스티나, 안젤리나, 마리아.
가정 폭력을 일삼던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를 받고있는 세 자매. 왼쪽부터 크레스티나, 안젤리나, 마리아.
◇사냥칼과 망치로 친부 살해…세 자매에겐 무슨 일이

연방수사위원회의 수사 결과 세 자매는 아버지가 잠든 틈을 타 사냥칼과 망치로 살해했다.

조사관과 자매의 변호인단에 따르면 하타투리안은 죽기 몇 시간 전에 정신과 진료를 받고 집에 돌아와, '집이 지저분하다'며 세 자매를 꾸짖고 얼굴에 후추 스프레이를 뿌렸다. 천식을 앓고 있던 큰딸 크레스티나가 그 바람에 호흡 부전을 호소하며 실신했다. 막내 마리아는 언니가 기절한 그 순간을 "마지막 결정타(final straw)"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크레스티나가 쓰러져 있는 동안, 안젤리나와 마리아가 헌팅 나이프(사냥칼)와 망치로 잠든 아버지를 공격했다. 오후 7시쯤 정신이 든 크레스티나가 거실로 나왔을 때 두 여동생이 아버지 위에서 격렬하게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곤, 후추 스프레이를 낚아채 아버지에게 미친 듯이 뿌렸다. 미하일이 절뚝거리며 아파트 계단으로 나갔다. 수사관들은 안젤리나가 그를 따라가 가슴을 칼로 찔렀다고 밝혔다.
아버지 살해 혐의를 받는 세 자매 중 막내 마리아(가운데)가 지난 28일(현지 시각) 모스크바에서 열린 공판 전 심리를 마치고 법원을 나서고 있다./AFP 연합뉴스
아버지 살해 혐의를 받는 세 자매 중 막내 마리아(가운데)가 지난 28일(현지 시각) 모스크바에서 열린 공판 전 심리를 마치고 법원을 나서고 있다./AFP 연합뉴스
◇3년 넘게 성폭행·감금 등 학대… “지옥 같은 집, 차라리 감옥이 낫다”

세 자매 측은 아버지가 2014년쯤부터 3년 넘게 성폭행과 감금, 폭행 등 학대를 일삼았다고 진술했다. 러시아 인권단체는 세 자매를 면담한 이후 "아버지가 딸들을 학교에도 보내지 않고 노예처럼 부리면서, 총칼로 협박했다"고 전했다.

변호인단은 "우리는 자매들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생각한다"며 정당방위를 주장했다. "소녀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지옥에 살고 있었다. 이들은 학대 증후군과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포함한 심각한 정신 질환을 앓았다"고 했다. 자매의 어머니 또한 하타투리안으로부터 감금과 폭행해 시달리다 2015년 집에서 쫓겨나 자매들을 만나지 못하고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큰딸 크레스티나의 변호사는 사건 한 달 전 그녀가 친구와 나눈 메신저 대화에서 '아버지가 또 나를 성폭행하겠다고 협박했다'며 '더는 못 견디겠다'고 한 내용을 공개했다. 또 변호사를 처음 만난 날 크레스티나는 "지금까지 살던 집에서 사는 것보다 감옥에서 사는 게 더 낫다"고 말했다고 한다.

안젤리나와 마리아는 2016년 초 흑해 연안의 휴양지인 애들러에 가족 휴가 때 있었던 일도 진술했다. 당시 휴가지에서 아버지와 단 둘이 한 방을 쓰던 언니 크레스티나가 성폭행 위협에 처하자 뛰쳐나와 알약 한 움큼을 삼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는 것이다. 이밖에 '과자를 너무 많이 먹는다' '셔츠가 제대로 다려져 있지 않다'는 등의 이유로 거의 매일 감금과 폭행이 이뤄졌다고 세 자매는 주장했다.

지난해 6월 검찰은 세 자매를 계획 살인 혐의로 기소했다. 사건 당일 오전 미리 흉기를 챙겨놓는 등 사전에 모의했다는 것이다. 기소 내용이 유죄로 인정되면 최대 징역 20년 형이 선고될 수 있다. 이들은 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서로 만나거나 사건의 목격자나 언론 매체와 접촉하지 못하도록 금지됐다.

◇'뼈만 안 부러지면 되지'…가정폭력 둔감한 러시아에 경종

이 사건은 러시아의 가정폭력 참상을 수면 위로 드러냈다. 러시아에서는 이때까지 가정폭력 가해자 처벌 및 피해자 보호 규정 없이 통상적인 폭행 사건과 동일하게 처리됐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017년 오히려 가정폭력 처벌을 완화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골절이나 뇌진탕 등으로 응급실에 실려가지 않을 정도의 구타나 멍, 출혈을 '심각하지 않은' 폭력으로 규정해 실형을 피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담겼다.

보수적인 러시아정교회 전통주의의 영향도 한몫했다. 러시아정교회는 2016년 "애정이 담긴 합리적인 처벌은 신이 허락한 부모의 권리"라고 주장했다.

세 자매의 아버지 살해 사건 이후 대대적인 시위와 청원이 촉발됐다. 가정폭력을 정확히 규정하고 처벌할 수 있는 법을 제정하라는 요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해 가정폭력 처벌을 강화하라는 온라인 서명이 65만 명을 넘어서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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