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이야기] '독도는 한국 영토' 새 자료들이 발견되다

입력 2020.08.02 11:00

[이선민의 독도이야기]
[13]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와 태정관지령
울릉도를 郡 승격시키며 관할 구역에 ‘독도’ 명기
“독도, 우리 땅 아니다” 日 최고기관이 판정 내려

※독도를 둘러싼 한국과 일본의 갈등은 한편의 대하드라마와 같다. 수많은 집념어린 인물들이 등장하고, 여러 가지 쟁점을 놓고 격론과 공방이 오간다. 그리고 무대 위에는 주인공인 한·일 양국뿐 아니라 심판 격인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사회가 있다. 1945년 일제 패망 이후 본격화된 ‘독도 문제’의 역사와 현황을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들을 포함하여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매주 일요일 연재한다. /편집자

해돋이 때 독도 모습./조인원 기자
해돋이 때 독도 모습./조인원 기자

1953년부터 1965년까지 한국과 일본이 일곱 차례나 외교각서를 주고받으며 독도 영유권에 관한 공방을 벌였을 때 두 나라가 제시한 근거 자료들은 대부분 근대 이전에 간행된 역사적 문서이거나 연합국최고사령관지령(SCAPIN) 등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에 나온 것이었다. 1905년 일본이 독도를 일방적으로 영토에 편입시킨 ‘시마네현 고시’나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대책 마련에 부심한 ‘심흥택 보고서’처럼 근대에 접어들면서 독도 분쟁이 내연하는 시기에 만들어진 것도 있었지만 이는 절차상 하자가 있거나 국내용이어서 국제법적인 근거가 약했다. 12년 동안이나 독도 영유권 논쟁이 계속되면서도 양쪽이 자기주장만 되풀이하면서 팽팽히 대립하고 접점을 찾지 못한 것은 이런 자료적인 한계도 원인이 됐다.

한일협정 이후에 양국의 독도 영유권 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간 가운데 한국과 일본의 학자가 이와 관련한 두 건의 중요한 자료를 새로 발굴했다. 동아시아에 근대적인 국제법 질서가 수립되는 19세기 후반~20세기 초에 만들어진 이들 새 자료는 당시까지의 논쟁 구도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두 나라의 학자와 외교관들이 새로 나타난 이들 자료의 해석과 활용을 놓고 고심하면서 독도 영유권 논쟁은 더욱 심화돼 갔다.

1900년 반포된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울릉도를 군(郡)으로 승격시키고 울릉도 본섬과 죽도, 석도를 관할하도록 했다. 석도는 독도이다.
1900년 반포된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울릉도를 군(郡)으로 승격시키고 울릉도 본섬과 죽도, 석도를 관할하도록 했다. 석도는 독도이다.

그 하나는 1960년대 후반 한국에서 나타난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였다. 오랫동안 울릉도를 비워놓는 공도(空島) 정책을 펴던 조선왕조는 1880년대 들어 ‘울릉도 개척령’을 반포하고 적극적인 주민 이주 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건너간 사람들이 불법으로 울릉도에 들어와 삼림 벌채와 어로활동을 벌이던 일본인과 마찰을 빚게 되자 양국 정부는 외교적 해결을 모색했다. 그 일환으로 1900년 5월말~6월초 한·일 공동조사단이 울릉도 현지를 시찰했다.

공동조사단의 한국 측 대표였던 우용정은 보고서에서 울릉도에 있는 일본인들의 철수와 함께 울릉도에 관한 관제(官制) 개편을 건의했다. 당시 울릉도는 현지인을 도감(島監)으로 임명해 사무를 관장케 했는데 부하 관리들이 없어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중앙 정부에서 행정 책임자를 파견하고 부하 관리들을 두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대한제국 정부는 이 건의를 받아들여 1900년 10월 27일 ‘칙령 제41호’를 반포했다. 그 제1조는 “울릉도를 울도(鬱島)로 개칭(改稱)하여 강원도에 부속(附屬)하고 도감을 군수(郡守)로 개정하여 관제 중에 편입하고 군등(郡等)은 5등으로 할 사(事)‘였다. 이어 제2조는 “군청 위치는 태하동(台霞洞)으로 정하고 구역은 울릉전도(全島)와 죽도(竹島) 석도(石島)를 관할할 사(事)”였다.

울릉도의 관할 구역을 규정한 조항에서 ‘울릉전도(全島)’는 울릉도와 그 주변의 작은 섬과 바위들을 통틀어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죽도’는 현재의 죽도를 말한다. 그런데 ‘석도’는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만 등장한다.

‘석도(石島)’는 훈(訓)으로 읽으면 ‘돌섬’이다. 19세기 후반에 전라남도 해안 사람들이 독도에서 어로·채취 활동을 많이 했는데 그들은 ‘석(石)’을 ‘독’으로 읽었다. 따라서 ‘석도’와 ‘독도’는 ‘돌섬’을 훈과 음으로 표기한 것이다. 이런 사실은 1946년 제1차 울릉도·독도 조사대에 참가했던 국어학자 방종현이 밝힌 바 있었다. 지금도 울릉도 주민들은 독도를 ‘돌섬’ ‘독섬’으로 부른다.

일본인 학자들은 석도가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 동북쪽에 붙어 있는 관음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의 근거와 그 타당성 여부, 이를 둘러싼 한·일 학자들의 논쟁은 따로 짚어볼 것이다.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는 1900년 10월 27일자 관보(官報)에 게재됐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존재는 잊혀졌다.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다시 세상에 알린 사람은 국제법적 측면의 독도 연구를 개척한 이한기 서울대 교수였다. 그는 1968년 서울대 법학연구소가 펴낸 『법학』 제10권 제1호에 실린 「국제분쟁과 재판: 독도 문제의 재판부탁성(付託性)에 관련하여」라는 논문에서 “문헌으로서 미발표의 자료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는데 일본 측은 또 예와 같이 간접증거라고 우길지 모르나 우리는 이것을 중시한다”며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소개했다. 그리고 “조문의 제2조에 ‘죽도 석도’가 보이는데 석도는 바로 독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독도의 독(獨)은 ‘독’, 즉 ‘석(石)’이라고 풀이되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한기는 이듬해인 1969년에 펴낸 『한국의 영토』라는 저서에서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 대해 좀 더 자세한 국제법적 해석을 가했다. 그는 “이는 독도가 한국의 주권 하에 있었다는 유력한 증거”라며 “1900년에 이미 한국은 독도에 대하여 보유하고 있던 원시적 권원(權原)을 실효적 점유라는 실정(實定)국제법이 요구하는 근대적 권원으로 대체했던 것”이라고 평가했다.

1877년 메이지 정부의 최고 국가기구인 태정관이 “울릉도[죽도]와 그 외 일도(一島)는 우리나라와 관련이 없다”고 판정한 태정관지령.
1877년 메이지 정부의 최고 국가기구인 태정관이 “울릉도[죽도]와 그 외 일도(一島)는 우리나라와 관련이 없다”고 판정한 태정관지령.

독도 영유권과 관련해서 또 하나 새로운 중요 자료는 1987년 일본에서 발견된 태정관지령(太政官指令)이었다. 호리 가즈오 교토대 교수는 『조선사연구회논문집』 제24호에 실린 「1905년 일본의 죽도(竹島=獨島) 영토 편입」이라는 논문에서 1877년 일본 최고 국가기관 태정관이 “울릉도와 독도는 우리나라와는 관계가 없다”라고 판정한 사실을 소개했다. 이 자료는 일본공문서관에서 찾아낸 것이었다. 그는 먼저 이 자료를 보았던 사람들의 명단에서 가와카미 겐조라는 이름을 발견했다. 일본 외무성에서 영토 문제를 담당했고 독도연구의 1인자로 꼽히던 바로 그 인물이었다. 가와카미는 이 중요한 자료를 보고도 외면했던 것이다.

태정관지령은 일본이 영토에 관한 지적(地籍)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당시는 아직 한국과의 독도 분쟁이 발생하기 한참 전이었기 때문에 외교적 고려는 전혀 없이 행정적인 관점에서 진행됐다. 이런 사실이 오히려 이 자료의 객관성과 역사적 가치를 뒷받침해준다.

19세기 중반 동해에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국가의 배들이 나타나서 섬과 바다에 관한 정보를 쏟아냈다. 일본인들은 자체적으로 전해오는 지식과 서구의 정보가 뒤섞여서 혼란을 겪었다.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인식에도 혼선이 빚어졌다. 섬의 개수에 대해서도 일도설(一島說), 이도설(二島說), 삼도설(三島說)이 엇갈렸다.

1876년 가을 일본의 지적을 편찬하던 내무성은 시마네현에 그 앞바다에 있다는 죽도(竹島)에 관한 정보를 조회했다. 내무성은 시마네현이 제출한 자료와 자체적으로 조사한 결과를 종합해서 ‘죽도’와 ‘외일도(外一島)’가 일본 땅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영토 문제는 중요하기 때문에 스스로 결론을 짓지 않고 태정관에 최종 결정을 의뢰했다. 태정관 심의에서도 내무성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인정됐다. “죽도외일도(竹島外一島)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와 관계가 없다는 것을 명심할 것”이라는 태정관지령이 내무성과 시마네현에 하달됐다.

메이지유신 직후에 근대 일본 정부의 최고기구가 독도는 일본 영토가 아니라고 판정했다는 사실은 독도 영유권에 관한 일본 측 주장에 불리했다. 그러자 일본의 학자들은 ‘외일도’의 이름이 명시돼 있지 않아서 어느 섬인지 판단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외일도’는 독도가 아니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태정관지령의 부속 지도인 ‘기죽도약도’. 울릉도의 동남쪽에 독도를 그려서 ‘그 외 일도’가 독도임을 분명히 밝혔다.
태정관지령의 부속 지도인 ‘기죽도약도’. 울릉도의 동남쪽에 독도를 그려서 ‘그 외 일도’가 독도임을 분명히 밝혔다.

이 같은 주장은 한 일본인 목사가 2005년 5월 울릉도와 독도가 나란히 그려져 있는 ‘기죽도약도(磯竹島略圖)’를 발견하면서 무력화됐다. 우연히 독도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우르시자키 히데유키 목사는 태정관지령을 직접 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일본공문서관에 가서 열람 신청을 했다. 그는 태정관지령 문서철에 작은 봉투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안에는 한 장의 지도가 접힌 채 담겨 있었다. 지도를 펼치자 ‘기죽도약도’라는 명칭이 보였고, 기죽도(울릉도)와 함께 그 동남쪽에 두 개의 작은 섬이 그려져 있으며 ‘송도(松島)’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외일도’가 독도라는 사실이 분명해진 것이었다.

우르시자키 목사는 ‘기죽도약도’를 재일교포 독도 연구자인 박병섭에게 전달했다. 새로 발견된 이 자료의 중요성을 인식한 박병섭은 2006년 6월 그가 운영하는 ‘죽도=독도문제연구네트워크’를 통해 공개했다. 또 그가 2007년 1월 나이토 세이추 시마네현립대 명예교수와 함께 펴낸 『죽도=독도 논쟁』에도 수록했다.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와 태정관지령이 발견됨으로써 19세기 후반~20세기 초 한국과 일본이 모두 독도를 한국 영토로 생각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였으며 1905년 시마네현 고시에 의해 근대적인 방법으로 다시 편입됐다는 일본의 주장에 큰 타격을 안겼다. 이제 독도 영유권에 관한 논쟁은 이 두 자료를 빼고는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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