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의 흙과 나무와 가마, 200년 세월을 빚다

입력 2020.07.31 03:42 | 수정 2020.07.31 09:04

[뜬 곳, 뜨는 곳] '도자기 도시' 경북 문경

지난 4일 경북 문경시 문경국가무형문화재 전수관에서 달항아리 제작 시연이 열렸다. 문경의 대표적인 도자 명가 영남요의 8대 김경식(53) 전수조교와 아들인 9대 김지훈(25) 전수생이 함께 물레로 흙을 빚어 달항아리를 상부와 하부 절반씩 만들어냈다. 두 부자가 서로의 몸통만 한 달항아리 아랫부분 위로 나머지 반쪽을 한 치의 어긋남 없이 붙이자 풍만한 달 모양의 항아리가 완성됐다. 객석에서는 탄성이 터져나왔다.

문경의 대표적 도예가인 국가지정중요무형문화재 김정옥 사기장이 문경국가무형문화재전수관 내 전통 장작 가마인 망댕이 가마 앞에서 구워진 도자기를 살펴보고 있다. 망댕이 가마에서 1300도가 넘는 화염으로 구워야 백자는 제 모습을 갖는다. 문경 지역에선 지금도 도예가 대부분이 장작 가마로 도자기를 굽고 있다.
문경의 대표적 도예가인 국가지정중요무형문화재 김정옥 사기장이 문경국가무형문화재전수관 내 전통 장작 가마인 망댕이 가마 앞에서 구워진 도자기를 살펴보고 있다. 망댕이 가마에서 1300도가 넘는 화염으로 구워야 백자는 제 모습을 갖는다. 문경 지역에선 지금도 도예가 대부분이 장작 가마로 도자기를 굽고 있다. /백산헤리티지연구소
문경새재로 유명한 인구 7만의 소도시 문경이 요즘 도자기의 도시로 떠오르고 있다. 단순히 옛 도자 문화의 보존에 그치지 않고 대중이 친근하게 즐길 수 있는 기반 시설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문경국가무형문화재 전수관이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일부 사기장과 전수자들이 전통 기술을 공유하고 교류하는 공방으로서의 성격이 강했지만 최근 몇 년 새 대중이 지속적으로 도자 문화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다양한 행사들이 열리고 있다. 달항아리 제작 시연을 포함해 2018년부터 문경에서 열리는 전통 도자기 체험 행사를 기획하고 있는 김남희(46) 백산헤리티지연구소장은 "전통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방법은 결국 그 시대의 대중과 소통하는 길뿐"이라고 했다.

문경은 조선 후기와 근현대 도자기 산업의 전통을 간직한 도시다. 백두대간의 중심에 위치한 문경의 고갯길 하늘재와 문경새재는 낙동강과 한강을 잇는 주요 교통로였다. 문경과 그 주변인 예천·상주에는 질 좋은 흙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고 황장산, 포암산, 주흘산 등지에선 도자기를 구워낼 수 있는 땔감이 충분히 공급됐다.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지자 도예가들이 모여들었다. 문경읍 관음리에는 200년 전쯤 만들어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망댕이(무 모양의 벽돌을 가리키는 문경 방언) 가마가 남아 있다. 지금도 문경시내 곳곳에선 검은 연기를 뿜으며 도자기를 굽는 망댕이 가마를 볼 수 있다.

지난 2019년 4월 27일부터 5월 6일까지 열린 제 21회 문경찻사발축제에서 참가자들이 물레로 도자기를 빚은 뒤 형태가 완성된 부분을 흙덩이에서 빌쇠(베는 칼)로 떼어내고 있다.
지난 2019년 4월 27일부터 5월 6일까지 열린 제 21회 문경찻사발축제에서 참가자들이 물레로 도자기를 빚은 뒤 형태가 완성된 부분을 흙덩이에서 빌쇠(베는 칼)로 떼어내고 있다. /문경시

지역 내에선 국가 지정 중요무형문화재 김정옥 사기장, 경북도 지정 무형문화재 천한봉 사기장 등 60여명의 장인과 도예가들이 요업을 이어가고 있다. 대부분은 전통식 장작 가마인 망댕이 가마로 도자기를 굽는다. 아버지 천한봉 사기장의 뒤를 이어 도예가의 길을 걷고 있는 천경희씨는 "온도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기계식 가마와 달리, 불이 도자기의 어떤 부분을 휘감을지 모르는 장작 가마에선 예상치 못한 무늬의 작품이 나올 때가 있다"면서 "자연이 주는 선물 같은 매력 역시 문경 도예가들이 전통을 지키는 이유"라고 했다.

문경의 도자 전통은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다. 1960년대 이후 일본인들이 선호한 전통 다완(茶碗·사발)을 재현해 생산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박경자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은 "문경 지역은 한국 근현대 요업이 단절 없이 현재진행형으로 살아 있는 현장"이라고 했다.

문경시는 지역의 도자 문화를 알리기 위해 지난 1999년부터 매년 찻사발축제를 개최했다. 올해는 코로나로 순연됐지만, 문경의 대표적인 문화행사로 자리 잡았다. 축제가 열릴 때마다 전체 문경 인구의 세 배가 넘는 21만명이 다녀갈 정도로 흥행에 성공했고,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정하는 명예 문화관광축제로도 선정됐다.

일반인들을 위한 도자 문화 체험 프로그램은 해를 거듭할수록 풍성해지고 있다. 문경시와 문화재청이 후원하고 문경국가무형문화재전수관이 주관하는 '문경새재에서 사기장의 길을 걷다'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지난 4~5일 전국에서 모인 가족 단위 참가자 30명이 1박 2일간 머물며 전통 방식으로 도자기를 빚었다. 딸과 함께 온 윤희(42)씨는 "이제 아이들이 집에 가면 밥그릇 하나, 찻잔 하나라도 소중히 여길 것 같다"고 했다.

문경시는 도자기를 지역 산업으로 활성화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과 조례를 준비하고 있다. 지난 3월에는 사업비 1억770만원을 투입해 20년 이상 이어온 전통 도자기 가업을 이어받는 도예가 6명을 지원하는 '전통공예 청년승계자 특별지원사업'을 추진했다. 지난 5월에는 '문경시 도자산업 육성 및 지원에 관한 조례'도 만들었다.

문경시는 '문경도자기홍보판매장'도 만들어 지역 도예가들이 제작한 다양한 작품을 관광객이 쉽게 관람하고 구매할 수 있도록 했다. 고윤환 문경시장은 "문경은 근현대 도자기의 전통이 여전히 살아 숨 쉬는 문화의 보고(寶庫)"라면서 "우리나라 도자 문화를 선도하는 도시로 거듭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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